“임신 중 산모가 잘 먹는 게 태아에게 중요하다.” 누구나 상식처럼 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임신을 해보면 잘 먹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입덧이 본격적으로 심해지는 임신 초기엔 산모가 잘 먹지 못하고 심지어 살이 빠지기도 한다. 가장 힘들고 걱정하는 이는 산모 본인인데, 여기에 주변 어른이나 지인까지 한마디씩 걱정을 얹으니 불안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임신을 진단받고 기뻐했던 산모가 몇 주 뒤 정기 검진 때 수척해진 얼굴로 의사에게 물어본다.
임신 중 산모의 영양 상태는 태아의 성장뿐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AI 이미지.
“산모가 이렇게나 못 먹어도 아기한테 괜찮나요?”
이 질문에 필자는 “‘산모가 못 먹어서 태아가 걱정될 정도’라는 건 이보다 훨씬 극단적인 상황을 말하는 거니 안심하세요”라고 대답해 드린다. 그래도 혹시 산모가 여전히 걱정을 내려놓지 못할까 봐 덧붙여 말해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영양실조는 생명 유지의 문제이므로 당연히 산모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산모와 태아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 좋은 건지, 얼마나 심해야 해가 되는지 등은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 제대로 조사하는 것은 윤리적 문제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연구를 위해 산모를 일부러 굶겨보는 미치광이 과학자는 없지만, 때로는 비극적인 역사가 거대한 실험장을 만들기도 한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연합군은 네덜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을 향해 공세를 펼쳤다. 이에 보복으로 독일군은 같은 해 9월부터 네덜란드로 향하는 모든 식량과 연료 운송을 전면 차단했다. 이 봉쇄 조치는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뜩이나 먹을 것과 땔감이 없는 지옥 같은 상황에 기록적인 강추위와 폭설까지 겹쳤고, 이 극한의 기아 속에서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네덜란드 대기근' 또는 '굶주린 겨울(Dutch Hunger Winter, Dutch Famine)'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은 배급받은 형편없는 식량으로 버텨야 했기에, 특정 영양소뿐만 아니라 모든 영양 성분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였다. 근대 선진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기근은 매우 드문 사례인 데다, 당시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어 훗날 과학자들의 연구에 소중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약 6개월 동안의 혹독한 기근 기간 중 임신했던 산모의 예후를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기근 시기에 태어난 아기들의 평균 몸무게는 평소보다 250g 정도 줄어들었지만, 다시 식량이 공급되자 정상 수준을 회복했다. 즉, 임신 중 엄마의 영양 상태가 아기의 출생체중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다행히 주산기 사망률(사산 및 신생아 조기 사망 비율)이나 태아 기형, 임신중독증 발병률에는 뚜렷한 증가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과거 동물 실험에서는 모체가 영양 부족을 겪으면 태자의 뇌 발달이 저하된다는 결과가 있었다. 하지만 기근 시기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이 19세가 되어 받은 신체검사 자료를 분석(Stein 등, 1972)한 결과, 산모의 심각한 영양 결핍과 아이의 지능 발달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기 관찰 연구(Kyle과 Pichard, 2006)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산모가 임신 중후반에 영양 결핍을 겪으면 아기가 비교적 가볍고 작고 마른 상태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후 고혈압, 천식 같은 호흡기 질환, 고지혈증, 당뇨 전단계(내당능 장애), 관상동맥질환 등의 발병 위험이 높았다.
산모가 임신 초기에 영양 결핍을 겪으면 여아는 성인이 되어 비만이 될 확률이 높았으나, 남아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울러 조현병을 비롯한 중추신경계 이상 비율도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태아 프로그래밍'이라는 가설이 생겼다. 임신 중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아가 경험한 영양 상태가 아기의 신체 구조와 대사 시스템을 영구적으로 ‘설정(프로그래밍)’하여, 성인이 된 이후의 건강과 질병 위험에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대기근 당시 자궁에 있던 태아는 영양이 부족한 환경에 맞춰 대사 시스템을 설정했으나, 출생 후 영양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서 대사 체계와 불일치가 발생해 각종 성인병에 취약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네덜란드 대기근 일화를 예시로 드는 이유는 한국의 일상에서는 산모가 '학계에 보고될 정도로 심각한' 기아를 겪진 않으니 안심하시라는 의도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야기의 결론은 다시 '임신 중 산모가 뭘 먹는지가 태아에게 영향을 준다'로 돌아가는 셈이니 산모의 걱정은 끝나지 않을 듯하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