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끝내기 위해 미국 의회가 초당적으로 마련한 대러시아 제재가 시행을 앞두고 제동이 걸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직접 서명했던 제재법의 핵심 조치들을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다.
미국이 러시아산 경유를 공급받기로 합의한 데 이어 추가 제재까지 유예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압박이 약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의 이번 결정이 러시아에만 도움이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러시아가 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경제 제재를 유예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지속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EU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은 현지시각으로 17일 엑스(X, 옛 트위터)에 미국의 제재 유예 결정을 두고 "이 모든 것을 되돌리고 막아버리겠다는 결정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분명히 러시아에만 도움이 된다"고 적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시행을 앞둔 '린지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에 따른 핵심 제재와 관세 부과를 유예하는 행정명령에 16일 서명했다. 이 법은 9월18일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서명해 제정됐지만, 주요 제재가 시행되기 이틀 전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으로 적용이 보류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조치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밝혔으나, 구체적 이유나 유예 종료 시점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기존 행정명령에 따라 시행하고 있는 대러시아 제재는 이번 조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자택에서 열린 모금 행사에서 이번 결정에 관해 "매우 좋은 결정이며 미국과 세계에도 좋은 결정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해당 제재법은 7월 갑작스레 사망한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이 리처드 블루먼솔 민주당 상원의원과 함께 추진한 법안이다.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 관계자와 금융기관, 제재를 피해 석유를 운송하는 이른바 '그림자 선단' 등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러시아산 제품에 5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주요 5개국이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 등에는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하도록 했다. 이 법안은 미국 의회에서 초당적 지지를 받아 통과됐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9월18일 직접 서명해 법률로 확정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엑스의 같은 게시글에서 "이 법은 막대한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며 "다만 실제로 시행돼야 하며, 이를 지지하는 모든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러시아가 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전역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 생산·송전 시설 15곳 이상을 공격했다며, 미국의 제재 중단과 러시아에 대한 압박 완화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격을 지속하도록 부추길 뿐이라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같은 날 기자들과 만나서도 "제재 완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러시아산 경유 공급 합의가 그 첫 단계라고 우려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협의를 거쳐 러시아산 경유를 미국과 국제시장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편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최대 60일 동안 대러시아 제재와 관세가 미국 및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측은 미국의 결정을 환영했다.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대통령 특사는 이번 제재 유예를 두고 "진정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