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당신의 지갑을 훔쳤다면 그 지갑은 누구에게 되돌아가야 할까? 1번 당신, 2번 국가.
2번이라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정유사가 담합 의혹을 받고 있지만 혐의가 확정돼도 납부할 과징금은 국가로 귀속된다.
담합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털어간 소비자의 돈을 온전히 소비자에게 돌려줄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유사들이 담합 의혹을 받고 있지만 혐의가 확정돼도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상받기는 쉽지 않다. 사진은 (앞줄 오른쪽부터 대각선으로)김종화 SK에너지 대표이사 사장, 송명준 HD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김창수 GS칼텍스 모빌리티앤마케팅(M&M)본부장 부사장이 12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담합 의혹과 관련해 증인으로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역시 전쟁으로 먹고사는 회사. 트럼프 만세", "오늘 가격 100원 더 올린다. 우리 올해 2조 벌듯."
미국-이란 전쟁 발발 나흘 뒤인 3월4일 국내 4대 정유사(HD현대오일뱅크, SK에너지, 에쓰오일, GS칼텍스) 가운데 한 곳의 가격결정부서 대화방에서 직원들이 나눈 실제 대화다.
정부는 정유사들이 담합을 했다고 보고 있다. 당신이 낸 기름값이 내지 않아도 될 돈이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7일 공정거래위원회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불안정한 틈을 타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가 가격 담합을 했다고 보고 심의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담합으로 영향을 받은 관련 매출액이 44조1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올해 경기도 본예산(당초예산) 40조577억 원을 넘어서는 규모다.
또 2개 정유사가 2022년 2월부터 2026년 3월까지 4년여 동안 휘발유·경유·등유 판매 가격과 관련한 입금가, 확정가, 판매 정책 정보를 교환한 것으로 의심했다.
정유사는 주유소 등 거래처와 사후정산이라는 관행에 따라 거래한다.
구체적으로 정유사는 우선 입금가를 정해 각 주유소에 석유 제품을 공급한다. 다음 달 초가 되면 정유사는 전 달 거래에 최종 적용할 확정가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입금가와 확정가의 차액을 정유사와 주유소가 정산함으로써 석유 제품 거래가 마무리된다.
즉 정유사가 정하는 입금가와 확정가에 따라 주유소 판매 가격과 소비자 구매 가격이 연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담합의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소비자가 피해를 보상받기는 쉽지 않다. 보상을 받으려면 정유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야 하는데, 개인이 거대 기업과 법정에서 맞서는 것 자체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담합으로 인한 피해 사실 입증도 소비자의 몫이다. 소송에 들어가는 긴 시간과 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렵다.
다만 소비자가 정유사의 담합에 맞서 도둑맞은 지갑을 되찾은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12년 화물연대 소속 화물트럭 기사 등 526명은 정유사들의 유가 담합으로 부당한 손해를 입었다며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6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1심에서 일부 승소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SK에너지, 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등 정유 3사가 담합으로 인한 손해가 인정된다며, 원고별로 최대 50만 원씩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담합의 영향이 미친 매출액만 44조 원으로 추산되는 이번 사태 역시 단순히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와 국고로 귀속되는 과징금 처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도둑맞은 지갑을 경찰이 찾아놓고 그 안의 돈을 국고에 넣어버린다면, 이를 온전한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정유사가 소비자의 돈을 털어갔다면 그 돈은 당연히 소비자의 지갑으로 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