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회공헌이 새로운 평가 기준을 맞고 있다. 기부금과 봉사활동 규모를 집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회문제를 얼마나 해결했는지 측정하는 방식이다. 인공지능(AI)이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성과를 정량화하는 도구로 활용되면서 기업 사회공헌도 투입 중심에서 성과 중심으로 무게추가 이동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2일 서울에서 열린 ‘생태계 리더십 교류(ELE)’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최 회장은 AI를 활용해 기업 사회공헌의 성과를 측정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한 보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K그룹 사회적가치연구원
16일 국내외 기업의 사회공헌 평가 체계를 살펴보면 기부금과 봉사 실적을 넘어 실제 사회문제 해결 성과를 측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사회공헌 성과 측정에 AI를 활용하자고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 회장은 지난 12일 서울에서 열린 ‘생태계 리더십 교류(ELE)’ 행사 기조연설에서 기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이 예산 투입과 홍보에 치우쳐 실질적 성과를 측정하는 체계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정밀한 가치 측정에 드는 비용을 AI로 낮추고, 사회적 가치 창출에 경제적 보상이 뒤따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SK는 사회공헌 성과를 측정하는 체계에 AI를 접목하며 이러한 변화를 구체화하고 있다. SK그룹의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지난 9월 AI 기반 CSR 측정·평가 플랫폼 ‘SEE SV’를 공개했다.
한국사회가치평가, 에이아이워크엑스(AIWORKX), 애커튼 파트너스 등과 공동 개발한 이 플랫폼은 CSR 사업의 기획부터 실행, 성과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해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도록 설계됐다. 사업에 얼마를 투입했는지뿐 아니라 그 결과 어떤 사회적 변화가 발생했는지 살펴보고,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향후 성과를 예측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고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SK가 이전부터 이어온 과제다. SK는 2015년부터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성과를 화폐가치로 환산해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사회성과인센티브(SPC) 제도를 운영해 왔다.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측정하고 이에 따라 보상함으로써 사회문제 해결에 참여할 유인을 높이는 방식이다. AI를 활용한 평가 고도화는 이러한 측정 체계의 비용과 복잡성을 낮추고, 더 많은 기업과 사회혁신 조직에 성과 평가를 적용할 가능성을 넓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카카오임팩트는 AI를 활용해 사회혁신 조직의 문제 해결 역량을 높이는 데 주목하고 있다. 카카오임팩트는 지난 9월 사회혁신 현장의 AI 전환 경험을 공유하고, 조직별 AI 활용 수준과 업무 변화를 진단할 수 있는 가이드를 공개했다. 사회혁신 조직이 AI를 활용해 업무 효율을 높이고 현장의 문제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도록 돕는 취지다.
재단은 구성원의 AI 활용을 지원한 뒤 업무 프로세스 개선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9%에서 65%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는 조직 내부의 업무 개선 경험을 나타내는 수치로, 사회공헌 사업이 수혜자에게 미친 영향을 직접 측정한 결과와는 구분된다. AI가 사회공헌의 성과 평가뿐 아니라 이를 실행하는 조직의 역량과 업무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는 AI를 활용해 사회공헌 자원의 배분과 실행 효율을 높이려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비영리단체 굿360(Good360)은 세일즈포스의 AI 기술을 활용해 기부 물품 배분을 지원한다. 재난 구호가 필요한 곳과 기부 물품을 연결하는 과정에 AI를 적용해 물품이 필요한 곳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달되도록 돕는 방식이다.
세일즈포스는 해당 기술의 활용으로 물품 배분 속도가 3배 빨라지고 탄소 배출량을 최대 20% 줄일 수 있다고 소개했다. 기부 규모를 늘리는 것뿐 아니라 같은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활용하는지도 사회공헌의 성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사례다.
이처럼 AI는 사회공헌의 성과를 측정하는 데서 나아가 자원 배분과 사업 실행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사업별 성과를 비교할 수 있다면 기업은 효과가 높은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업은 원인을 분석해 개선할 수 있다.
지원을 받는 사회적기업과 비영리단체도 사업의 필요성과 효과를 구체적인 자료로 입증할 수 있어 후속 지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공헌이 일회성 기부나 홍보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진다.
다만 측정 가능한 수치가 사회적 가치의 전부는 아니다. 취약계층의 자립이나 지역사회 신뢰 회복처럼 단기간에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변화도 있다. AI가 분석한 결과가 실제 사회적 영향과 일치하는지 검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기업에 유리한 지표만 선택하거나 정량화하기 쉬운 사업에 자원이 쏠리면 오히려 사회공헌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