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과 희소성, 선택받은 '1%'를 좇아온 패션의 무대에서 과감히 '99%'를 전면에 내세운 주인공은 패션 브랜드 마티에르 페칼(Matières Fécales)이다. 이들이 2027년 봄·여름(S/S) 컬렉션에 붙인 이름 역시 'THE NINETY NINE PERCENT', 바로 '99퍼센트'였다.
마티에르 페칼 디자이너 스티븐 라지 바스카란이 10월1일(한국시각) 인스타그램에 파리 패션쇼 현장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마티에르 페칼 인스타그램
런웨이에서는 '99%'의 메시지를 시각화한 강렬한 장면도 등장했다. 쇼 초반 모델들은 포대기에 싸인 아기 형상을 품에 안고 걸었다. 쇼 후반부에는 젊은 흑인 모델들이 나이 든 백인 남성의 모습을 본뜬 실물 크기의 마네킹을 등에 업고 등장했다. 마네킹의 눈에는 달러 지폐가 안대처럼 씌워져 있었다.
아티스트 사라 싯킨(Sarah Sitkin)이 제작한 이 마네킹은 전 시즌 '1%'와 이번 시즌 '99%'를 연결하는 장치로 등장했다. 전 시즌 런웨이의 중심에 세웠던 '1%'를 이번에는 '99%'의 등에 짊어지게 함으로써 부와 권력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뒤집어 보여준 셈이다.
마티에르 페칼은 9월2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에서 '99%' 컬렉션을 선보였다. 집회와 시위 등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여온 레퓌블리크 광장을 런웨이로 삼은 것이다. 레퓌블리크 광장의 중심에는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공화국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마티에르 페칼 디자이너 스티븐 라지 바스카란이 10월1일(한국시각) 인스타그램에 파리 패션쇼 현장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영상의 한 장면. ⓒ마티에르 페칼 인스타그램
마티에르 페칼의 디자이너 스티븐 라지 바스카란(Steven Raj Bhaskaran)은 1일(한국시각) 인스타그램에 "99명의 유색인종 모델, 99개의 존엄한 룩, 99개의 두려움 없는 목소리, 99개의 검열되지 않은 메시지, 99개의 실제 삶의 경험"이라고 적었다.
그는 "나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다"며 "내가 자란 세상에서 꿈을 꾸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특권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내 주변에는 수많은 이민자 가정이 있었다"며 "그들 역시 매일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살아갔지만, 끝없는 믿음으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의 사랑을 떠올리며, "내 주변의 누구도 감히 좇으려 하지 않았던 하나의 감정을 향해 달렸다"고 말했다. 그가 좇은 것은 '자유'였다.
바스카란은 과거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했던 순간도 떠올렸다. 그는 "내 문화를 부끄러워했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며 "사회 안에서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불리한 조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의 힘이며 억압에 맞설 수 있는 나의 무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경험은 이번 '99%' 컬렉션의 출발점이 됐다. 그는 이번 컬렉션에 대해 "99퍼센트 안에서도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 즉 소외된 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다.
이어 "매일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는 이민자들, 성장하고 성공할 기회조차 좀처럼 주어지지 않은 채 그저 살아남도록 강요받는 유색인종들, 자신들을 억압하는 권력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데 지쳐버린 노동계급"이라며 소외된 이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그는 이어 "나는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당신은 아름답고,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의 존재는 중요하며,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와 문화,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아름다움 역시 럭셔리라는 세계가 지금까지 찬양해온 다른 모든 이야기와 문화, 미의 관점만큼이나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안에는 힘이 있다"며 "이제 우리가 모두 하나로 뭉쳐 이 권력의 구조에 맞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진정한 평등을 향한 희망을 품고. 레퓌블리크는 우리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바스카란이 마지막에 던진 "레퓌블리크는 우리의 것이다(The République is ours)"라는 선언은 쇼의 무대인 레퓌블리크와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동시에 환기한다. 사회에서 소외돼 온 이들 역시 이 사회를 이루는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쇼는 지난 3월3일 공개된 2026 가을·겨울(F/W) 컬렉션 '1%(THE ONE PERCENT)'와 직접 연결된다. 당시 마티에르 페칼은 나폴레옹 시대에 세워진 옛 파리 증권거래소인 팔레 브롱니아르를 런웨이 무대로 삼았다. 부와 특권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최상위 부유층인 '1%'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을 과장된 모습으로 등장시키며 부와 권력의 세계를 풍자했다.
두 컬렉션은 공동 디자이너의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1%'가 특권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한나 로즈 돌턴의 경험과 부유층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면, '99%'는 가이아나에서 극심한 가난을 겪으며 성장한 바스카란의 어린 시절과 자유에 대한 경험을 중심에 놓았다.
브랜드명 마티에르 페칼에도 이들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마티에르 페칼(Matières Fécales)'은 프랑스어로 직역하면 '배설물(fecal matter)'이라는 뜻이다.
디자이너 돌턴은 2025년 3월7일 보그 비즈니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브랜드명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패션 산업의 환경·노동 문제와 다양성 부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업계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낼 이름을 고민하다 '배설물(fecal matter)'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당시 프랑스어권인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공부하던 이들은 이를 프랑스어 '마티에르 페칼(Matières Fécales)'로 옮겼다. 뜻을 모르면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들리지만, 실은 '배설물'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감춰진 패션 산업의 불편한 이면을 이름 자체에 담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