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제트추진 드론 등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의 정부기관과 국립 학술기관을 잇달아 타격하면서, 그동안 비교적 안전했던 수도 중심부까지 러시아 공격 사정권에 들어왔다.
우크라이나는 제트드론의 요격률을 높일 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앞으로 최소 몇 달 이상 러시아의 수도 공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선에서 러시아가 '야금야금' 전진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수도 타격으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인프라에 심각한 손상이 예상된다. 이는 '국가 체력'의 고갈로 이어져 전쟁 전체의 끝을 향해 가는 신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내 중심부에 자리잡은 국립과학아카데미가 28일(현지시각) 러시아 드론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다. ⓒ AFP통신=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아카데미 건물이 28일(현지시각) 러시아 제트 드론에 피격돼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키이우의 '종로' 볼로디미르스카 거리,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우크라니아 수도 키이우는 이달 들어 도심의 주요 기관 두 곳이 공격을 받았다. 9월4일에는 정보기관인 국가보안국(SBU) 청사가 제트드론에 피켝됐다. 2022년 2월 전쟁 발발 이후 SBU 건물이 피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월28일에는 국립과학아카데미가 공격받아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SBU 청사와 국립과학아카데미, 타라스 셰우첸코 국립대학교는 모두 볼로디미르스카 거리 인근에 있다. 대사관과 정부 청사가 몰린 도심 핵심 지역으로,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양상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지난 27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관저 건물도 피해를 입었다. 셰우첸코 국립대학교는 29일부터 수업을 원격으로 전환했다.
러시아가 이번 공격에 활용한 제트추진 드론은 이란제 샤헤드 계열에 제트엔진을 단 유형으로, 프로펠러형보다 빨라 요격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젤렌스키 대통령도 28일 전체 드론 요격률이 70%지만 제트드론은 57%라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쪽 공격력을 깎아내린 전례가 많은데 제트 드론의 파괴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밤낮 없는 공습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수도의 피로가 극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매일 낮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서 공공기관은 정상 운영에 어려움이 커지고, 일반 시민들은 전쟁의 공포에 매일 직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전략·공공정책개발센터의 일리야 코토우 대표는 현지매체 노비니 라이브에 "국가기관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깨진 것으로 보인다"며 "이제 안전한 건물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벨기에로부터 F-16 전투기 3대와 F-16 전투기용 탄약을 지원받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방공재원 부족에 따른 피해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격 미사일과 공군 전투기를 공급받는다고 해도, 러시아가 매일 1천 대 이상씩 제트 드론을 날린다면 당분간 '방법'이 없을 수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UPI=연합뉴스
전선에서 병참, 다시 후방으로
전문가들은 보통 전쟁의 양상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전선 대치가 1단계, 전선 뒤 병참과 종심 타격이 2단계, 후방 산업·공공시설 직접 공격이 3단계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제3 단계까지 이르렀다는 진단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선은 겉보기에 큰 변화가 없지만 러시아가 조금씩 잠식해 왔다. 전선은 우크라이나 서쪽 돈바스 지역에 넓게 펼쳐져 있다. 4년 이 넘은 전쟁 기간에 러시아는 꾸준히 이 지역을 점령해 왔고, 최근 들어 돈바스 지역의 약 20%만을 우크라이나는 통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크라마토르스크와 슬로비얀스크 등 '요새 도시'를 거점으로 핵심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들 요새 도시도 이번 겨울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러시아는 흑해 항구 도시 오데사를 중심으로 병참선을 집중 타격하고 있다. 오데사 일대 항만은 우크라이나 수출의 약 90%를 맡아 왔지만, 르몽드는 7월부터 선박 운항이 사실상 멈춘 상태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최근 오데사 지역과 내륙을 연결하는 다리까지 파괴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해물 운송을 다뉴브강에 의존하는데, 이는 우크라니아와 루마니아의 접경지역을 흘러 훨씬 먼 거리를 돌아야 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접경지역에 있는 철도도 노리고 있다. 지난 13일 폴란드 국경 2km 지점 야호딘역에서 키이우발 바르샤바행 열차 기관차가 드론에 맞았고, 15일에도 볼린주에서 디젤 기관차가 피격됐다.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침공 이후 파괴된 기관차가 500대를 넘고, 절반 이상이 올해 입은 피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3월 이후 러시아군의 순영토 증가가 거의 없다고 평가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제트 드론과 탄도미사일 등 장거리 타격으로 2027년 봄까지 굴복을 끌어내려 한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의 총선거 방해를 명분으로 키이우 공습을 강화했다. 특히 겨울을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향한 공격에도 더욱 힘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총선 마지막 날인 9월20일 모스크바 일대에 대규모 드론 공격을 진행했다.
러시아 드론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내 중심부 정보기관 국가보안국 청사. ⓒ 로이터=연합뉴스
겨울 앞두고 커지는 불안
러시아는 지난해 겨울 키이우 에너지 시설을 집중 공격했고, 전기와 난방이 끊겨 시민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올해는 연료 공급망도 표적이 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 드론과 폭탄이 올여름 우크라이나 주유소 수백 곳을 불태웠다고 전한 바 있다.
미국 전쟁연구소는 푸틴 대통령이 이번 겨울에도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어,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혹한 속에서 다시 큰 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바라봤다.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전선을 유지하면서 러시아 후방에 대한 드론 공격을 통해 반격에 나서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6월 러시아 정유 처리량이 20년 만의 최저인 하루 380만 배럴로, 1년 전보다 약 30% 줄었다고 밝혔다. 러시아 쪽도 모스크바 일대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총선 기간 공습으로 정유시설이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후방 타격이 러시아를 묶어두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싱크탱크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러시아의 정유시설 다수가 몇 주 안에 가동을 재개했고, 여유 설비와 기존 재고가 충격을 흡수했다고 분석했다.
요컨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의 제트드론 공습이 몇달 동안 매일 이어지고 우크라니아 쪽이 이를 막을 대책을 찾지 못한다면, 이번 겨울을 고비로 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전문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