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세계 최대 석유수입국인 중국이 막대한 전략비축유와 정제능력을 앞세워 유가 급등을 완화하는 한편, 주변국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조절하며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동안 국제 에너지 시장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미국과 같은 산유국이 좌우해 왔다. 그런데 최대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이 이번 전쟁을 거치면서 에너지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18일 분석 기사를 통해 "중국이 미국-이란전쟁 발발 이후 첫 6개월간 석유 수입량을 전년 동기 대비 23% 줄임에 따라 국제유가가 우려했던 것만큼 오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공급이 이란의 통항제한으로 크게 줄었는데도 국제유가 애초 예상만큼 오르지 않았는데, 이는 세계 최대 매수자인 중국이 스스로 수요를 조절하며 시장의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초 국제사회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국제유가가 급등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골드만삭스 분석기준으로 올해 8월 말 국제유가는 중국이 미국-이란전쟁 전 수준으로 원유를 구매했다고 가정했을 때보다 배럴당 약 10달러 낮게 유지됐다.
이런 '반전'은 중국이 오랫동안 조용히 쌓아온 전략비축유가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완충장치 구실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추산에 따르면 중국의 전략비축유는 2025년 12월 기준 약 14억 배럴에 달해,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권고하는 90일치 수입분을 훨씬 웃도는 140~180일치 수준이라고 한다.
여기에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로 확충해 온 정제 설비, 그리고 전기차·고속철도·석탄화학 같은 대체 에너지 인프라까지 더해지면서, 중국은 원유수입을 큰 폭으로 줄여도 국내경제가 버틸 수 있는 여력을 확보했다.
실제로 중국 해관총서(세관) 공식 통계기준으로 중국의 8월 원유수입량은 하루 893만 배럴로, 미국-이란전쟁 전 3개월 평균보다도 40% 가까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AP통신=연합뉴스
중국, '정제연료 수출'로 국제 에너지 공급량 조절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중국이 단순히 에너지 수입국에 그치지 않고, 국제 에너지시장의 중요한 공급자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당국은 미국-이란 전쟁 초기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공급이 줄어들자 항공유·가솔린·디젤 등 정제연료의 대외 수출을 엄격히 제한했다.
다만 이 와중에도 베트남이나 태국처럼 중국과 관계가 원만한 국가에는 소량이나마 연료를 보냈다. 그러면서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을 빚어온 호주나 필리핀에는 사실상 공급을 중단했다.
이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와 비슷한 패턴으로 중국이 에너지 공급을 외교적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중국은 올해 7월 초 연료 수출 제한을 풀었지만, 에너지업계 전문가들은 중동정세가 다시 악화하면 수출통제가 재개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원자재 데이터 분석업체 캡플러(Kpler)에 따르면 8월 중국의 경질·중질 유분(디젤·가솔린 등) 수출은 하루 96만3천 배럴로, 전쟁 전 3개월 평균인 하루 71만3천 배럴을 웃도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이 흐름이 계속될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의 원유 정제기술을 바탕으로 한 수출통제가 이제는 세계 디젤 시장이 주시해야 할 변수가 됐다.
이런 흐름은 그동안 생산량 조절로 국제유가를 좌우해 온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입지에도 미묘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교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의 에리카 다운스 선임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중국이 (석유시장에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OPEC이 의식해야 할 존재가 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메건 오설리번 전 미국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사우디아라비아가 공급 조절력으로 수십 년간 지정학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처럼, 이제는 중국이 정제능력과 수출조절을 통해 각국과 벌이는 외교협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설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메건 전 부보좌관은 "사우디가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지난 수십년간 얼마나 큰 영햑력을 갖게 됐는지 생각해보라"며 "중국이 수요 측면과 정제유 수출 측면에서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면 미국과 다른 국가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