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멈춘다'는 뜻의 처서(處暑). 예부터 처서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무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찾아온다고 했지만, 이제는 이 말마저 무색해지고 있다. 최근 처서의 평균기온은 과거보다 3도 안팎 높아졌고, 한낮 30도를 웃도는 폭염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기후변화가 계절의 경계까지 바꾸면서 '처서 매직'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날씨는 계속해서 더워지고 있다. AI 이미지.
23일 일요일은 절기상 처서다. 하지만 올해 처서에도 무더위는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서울은 대체로 흐린 가운데 낮 최고기온이 30도 안팎까지 오르는 등 높은 기온과 습도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름 그대로라면 더위가 한풀 꺾여야 할 시기지만, 현실은 오히려 늦더위에 가까운 모습이다.
실제 최근 10년간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칠석과 처서의 전국 평균기온은 1973년 이후 첫 10년간 평균보다 3도 안팎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3년간 처서의 전국 평균기온은 27.5도, 일최고기온 평균은 32.2도에 달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옛말은 정말 옛말로 남게 됐다.
지난해에는 이러한 변화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2025년 8월23일 처서 당일 전국 곳곳에서 관측 사상 가장 뜨거운 처서 기록이 쏟아졌다. 대구의 낮 최고기온은 37.2도까지 치솟아 1973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처서 기온을 기록했다. 강원 삼척 신기에서는 전국 최고기온인 37.5도가 관측됐고, 대전도 34.1도까지 오르며 중부지방 처서 최고기온 기록을 새로 썼다.
문제는 기록적 더위가 단순히 불쾌감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국리서치의 정기조사 '여론 속의 여론'에 따르면 조사 대상 1천 명 가운데 80%가 '덥거나 습해서 밤잠을 설쳤다'고 답했다. 더위나 폭우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응답도 59%에 달했다. 19%는 날씨 때문에 병원에 갈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더위의 피해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자신을 ‘최하층’이라고 인식한 응답자 가운데서는 30%가 2025년 여름 날씨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답했다. 기후변화가 단순한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격차에 따라 피해가 달라지는 문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8년, 처서 지나도 고통은 그대로
쿨링포그가 설치된 골목에서 더위 피하는 쪽방촌 주민들. ⓒ연합뉴스
폭염이 길어질수록 가장 먼저 한계에 부딪히는 이들은 주거와 노동환경이 열악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폭염이다. 질병관리청의 '2018년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 운영 결과'에 따르면 같은 해 5월20일부터 9월10일까지 온열질환자는 4526명, 사망자는 48명에 이르렀다. 처서가 지난 뒤에도 폭염으로 인한 질환자와 사망자가 계속 발생했다.
당시 온열질환자 가운데는 고령자와 저소득층, 독거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상당수 포함됐다. 공익연구센터 블루닷이 질병관리청의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5~2025년 온열질환 발생 중 약 47%가 일터와 관련이 있었고, 그중 실외 작업장에서의 발생이 약 68%, 실내 작업 15%, 논밭 등이 17%를 차지했다.
이처럼 더위는 취약계층에게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중이다. 경북대와 계명대 연구진이 2024~2025년 동안 대구 쪽방 40곳에 열 환경을 측정하고 쪽방 주민들의 반응과 증상을 조사한 결과, 6월부터 8월까지 평균 쪽방 온도는 32.1도였으며, 최고 40도까지 오르는 날도 많았다. 실내 습도는 30%에서 90%까지 오르내리기도 했다. 쪽방 주민의 여름 평균 수면시간은 4.2시간이었다.
폭염이 반복되는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온이 조금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폭염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건설·농업 등 야외 노동자와 냉방시설을 충분히 이용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는 처서 이후의 늦더위 역시 여전히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2027년, 어떤 처서가 될까?
2024년 여름 측정된 지구 대기 온도를 영상화한 모습. 대부분 지역이 불타는 듯 빨간 색으로 표시됐다. 온난화로 인해 지구는 매년 더 뜨거워지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지구 관측소
그렇다면 앞으로의 여름은 어디까지 뜨거워질까? 최근 기록적인 폭염의 배경에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온 상승을 비롯해 열돔 현상과 엘니뇨 등 여러 기후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강한 엘니뇨가 발생할 경우 이미 뜨거워진 지구의 기온과 맞물려 폭염 등 극한기상의 강도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엘니뇨는 적도 태평양 중부와 동부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현상으로, 전 세계 대기 흐름과 기온·강수 패턴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은 이 같은 엘니뇨가 올해 가을부터 초겨울 사이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1950년대 관측 기록이 시작된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으로 발달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이번 엘니뇨가 강하게 발달하는 시점에 지구 자체가 이미 전례 없이 뜨거워졌다는 점이다.
엘니뇨로 인해 높아진 기온이 인간 활동으로 인한 장기적인 온난화와 겹칠 경우 극심한 폭염을 비롯한 이상기후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결국 앞으로의 여름은 단순히 '더 더운 여름'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기온 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우는 계절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