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생계를 책임지고 아내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전통적 여성상을 뜻하는 '트래드와이프(tradwife)' 인플루언서들이 점점 어려지고 있다.
최근에는 더 어린 세대까지 틱톡에 등장했다. 이들은 직접 고른 재료로 근사한 저녁을 차리고 남편과 가족을 살뜰히 챙기며 즐겁게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달라진 것은 나이다. 최근 틱톡에서 활동하는 트래드와이프 가운데는 이제 막 성인이 된 18·19세 여성들도 적지 않다.
에이바 아하바트는 올해 여름 틱톡 영상에서 "나는 19살이고 결혼했으며 학위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다니는 직장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삶이 내가 원한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해당 영상은 온라인에서 논란이 된 뒤 아하바트가 삭제하기 전까지 약 1700만 회 재생됐다.
한 레딧 이용자는 영상을 보고 "남편과 한 번만 다퉈도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아하바트가 틱톡에 올린 일상은 걱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단정한 퍼프소매 원피스에 고가의 반클리프앤아펠 팔찌를 차고 영상 내내 환하게 웃는다.
또 다른 10대 트래드와이프 릴리는 지난해 18세에 낳은 아이를 돌보고 요리하는 일상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 올린다. 릴리가 실제로 이런 가정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해도 일부 영상에서는 논란을 의도한 듯한 연출이 눈에 띈다.
한 영상에는 "샌드위치 만들어줘. 네, 알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하늘거리는 면 원피스를 입은 릴리는 주방을 오가며 로스트비프 샌드위치를 재료부터 직접 만든다.
전문가들 "10대 딸을 둔 부모들의 걱정은 당연하다"
화려한 트래드와이프 영상에 10대 딸이 빠져들까 걱정하는 부모들도 있다. 젊은 여성이 전업주부를 꿈꾸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삶의 위험과 대가는 지운 채 이를 이상적 선택처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로리 빈디그 유스먼 미국 세이크리드하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 교수는 트래드와이프 콘텐츠가 여성들에게 왜곡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제 막 성인이 된 18·19세 인플루언서들의 영상은 이보다 어린 소녀들에게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유스먼 교수는 허프포스트에 "교육과 사회 경험이 부족한 이 젊은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완전히 의존한다"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알아갈 기회도 갖기 전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하는 삶에 자신을 맞춘 젊은 아내이자 엄마들"이라고 말했다.
부모들의 우려를 사는 콘텐츠는 트래드와이프 영상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이른바 '소프트 라이프(soft life)'를 내세운 영상도 늘고 있다.
이들은 결혼관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남편이 마련해주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자연스럽게 동경하게 만든다. 필라테스 수업을 다니고 고급 SUV인 G바겐을 타며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여유롭게 사는 모습이다. 트래드와이프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젊은 여성들에게 전통적 성 역할을 매력 있는 선택지로 보여주는 또 다른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젠더와 여성주의 신학을 연구하는 캐럴라인 클라인 미국 클레어몬트대학교 연구교수는 이러한 영상이 철저하게 연출된 콘텐츠라는 점에 주목했다.
클라인 교수는 "영상은 짧고 편안하며 시각적으로 매력적"이라며 "집은 고요하고 여성은 대체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갈등이나 피로, 지루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 영상에는 젊은 엄마가 프릴 원피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며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디즈니 공주처럼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영상 설명에는 "나는 19살에 약혼했고 곧 결혼했으며 불과 1년 뒤 첫아이를 낳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경고하던 삶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문구가 붙었다.
클라인 교수는 "현실이 아니다"라며 "트래드와이프 콘텐츠를 내세워 팔로워를 모으고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을 수익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모순이 있다. 남편이 생계를 모두 책임진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이들 역시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돈을 번다. 구독자를 끌어모으는 방법과 알고리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영상 촬영과 편집에도 상당한 시간을 들인다.
일하지 않는 삶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인플루언서'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인 셈이다.
물론 전업주부가 되는 선택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여성이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아기를 안고 농가풍 주방에 서는 삶 역시 스스로 원한 선택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트래드와이프 콘텐츠에서는 전업주부의 삶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육아와 집안일의 고단함이나 경제적 독립을 포기했을 때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젠더와 디지털 공간을 연구하는 케이트 스콧 연구원은 트래드와이프 콘텐츠가 최근 특히 주목받는 배경으로 '불안한 경제 상황과 번아웃, 고단한 노동환경'을 꼽았다.
트래드와이프 운동은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에게 유행했던 이른바 '걸보스' 문화와 정반대에 서 있다. 직업적 성공과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라는 '걸보스'의 메시지와 달리 트래드와이프 콘텐츠는 아예 경쟁에서 내려오는 삶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팍팍한 경제 현실 속에서 성인이 된 젊은 여성들에게는 이런 선택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스콧 연구원은 "보육비는 오르고 정치적 피로는 커지며 노동시장은 약해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은 직장이나 돈 문제를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삶을 낭만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영상 속 삶에는 복잡한 고민도 없다. 남편이 돈을 벌고 재정을 책임지는 동안 아내는 반짝이는 대리석 조리대를 닦고 천연 재료로 아기의 이유식을 만든다.
스콧 연구원은 "누군가는 이런 삶이 여성을 경제적 학대에 취약하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를 끝낼 능력까지 약화한다고 본다"며 "반면 다른 사람들은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노동시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자 갈수록 커지는 보육 문제를 피해갈 돌파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래드와이프 콘텐츠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하다. 남편이 돈과 생활, 중요한 판단까지 책임지면 자신은 삶의 소박한 즐거움만 누리면 된다는 것이다.
스콧 연구원은 "여러 면에서 허상에 가깝다"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외벌이로 사는 것은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많은 트래드와이프 인플루언서는 원래부터 막대한 부를 누렸거나 부유한 집안과 결혼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
하지만 화면 속 삶은 대다수 여성이 맞닥뜨린 경제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전직 트래드와이프가 들려주는 틱톡 밖의 현실
화려한 영상 밖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학력이나 경력, 독립적 수입 없이 결혼생활을 끝낸 뒤 다시 삶을 꾸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겪은 전직 트래드와이프들이다. 트래드와이프 콘텐츠를 접하는 10대들에게 이런 경험담 역시 함께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빵사이자 틱톡 크리에이터인 텀버거는 트래드와이프의 꿈이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어린 트래드와이프들의 영상을 볼 때마다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편에게 10년 동안 경제적으로 의존하다가 버림받았다는 텀버거는 "틱톡에 새로 등장한 10대 트래드와이프 영상을 보고 솔직히 어느 정도는 안쓰러웠다. 나도 똑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결혼생활과 반려동물,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까지 잃었다"며 "경제권을 통제당했고 부부 사이의 친밀감과 성관계마저 결혼생활에서 나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억압받았다"고 털어놨다.
현재 자신의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하는 텀버거는 전통적 결혼생활이나 전업주부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응원하는 좋은 남편을 만난다면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다"며 "하지만 그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인생의 통제권을 완전히 넘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어린 여성은 먼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며 "평생 다른 사람을 돌보며 살기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게이지 역시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넘쳐나는 트래드와이프 콘텐츠에 맞서 자신의 경험을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전하고 있다.
게이지는 "19살에 약혼했을 때 나는 행복한 미래를 확보했다고 믿었다"며 "그러다 44살이 됐을 때 '신앙심 깊은 부양자'였던 남편은 19살 여성과 살겠다며 나와 아이들을 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은 나쁜 결말을 피할 예외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게이지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보다 자신의 삶을 먼저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삶을 만들고 돈을 모으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라. 그다음 원한다면 사랑에 빠져도 된다"며 "남자는 인생 계획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 허프포스트코리아는 미국 허프포스트와 제휴를 통해 기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번역·정리 강서원 허프포스트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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