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사전 통보하지 않은 채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지시하고 실제 훈련 규모까지 축소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평화를 만들기 위한 큰 결정"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북한이 한미 군사훈련 축소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안에 북미정상회담을 열겠다고 적극적 의사를 보이는 가운데, 양쪽을 잇겠다고 나선 이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구상이 첫 시험대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통령이 19일 밤 11시52분 엑스(X, 옛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이번 트럼프 대통령님의 메시지는 한반도에서 적대와 대결을 넘어 평화를 만들기 위한 고심이 담긴 큰 결정으로 느껴진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한미연합연습과 야외기동훈련 축소를 통해서라도 한반도에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 여건을 조성하려는 트럼프 대통령님의 의지와 노력에 공감하며 그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과 가진 첫 정상회담에서 자신을 한반도 평화의 '페이스메이커',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메이커'로 규정했던 구상도 다시 꺼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님의 결단이 북미 간 신뢰 구축과 대화 재개를 거쳐 한반도의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며 "트럼프 대통령님의 피스메이커 활동을 촉진하고 기여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은 일단 냉담하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은 같은 날 이 대통령의 메시지가 공개되기 한 시간 전에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담화를 공개했다.
김여정 부장은 이번 '주요 국제문제들에 대한 입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훈련 축소 지시를 두고 "평할 가치도 없다고 보며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부장은 "훈련의 규모나 기일이 줄어든다고 해서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군사연습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 측이 이번에 취한 조치를 그 무슨 '선의의 조치'로 선전하려 한다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김 위원장과 소통했다고 밝힌 데 대해서도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다만 북미 정상 간 대화 가능성까지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다. 김 부장은 "우리 국가수반이 트럼프에 대해 개인적으로 좋은 추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며 "두 지도자의 관계는 여전히 훌륭하다"고 했다.
반면 한국을 향해서는 한미연합훈련과 핵추진잠수함 도입 등을 거론하며 "적대적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훈련 축소를 북미 간 신뢰 구축 조치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직접 대화 가능성만 남겨둔 셈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안에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밝히면서 한미군사훈련 규모도 한미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축소하도록 지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현지시각) 자신과 김 위원장의 "매우 좋은 관계"를 이유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에게 한미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8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이르면 올가을 김 위원장과 만날 수 있도록 참모들을 재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담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19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트루스소셜에 밝힌 내용은 우리 정부는 물론 미국 정부 관계자들도 전혀 사전에 알지 못했다"며 "우리도 사전 통보받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이후 한미 군 당국은 협의를 거쳐 훈련 조정 방안을 확정했다. 당초 17일부터 27일까지 진행하기로 했던 '을지 자유의 방패(UFS)'는 21일 끝난다. 북한의 공격을 방어하는 1부 연습은 진행하지만 24일부터 시작하는 반격 작전 중심의 2부 연습은 취소됐다. 연합 야외기동훈련도 일부 축소하거나 연중 다른 시기로 순연한다.
이미 시작된 전구급 한미연합훈련이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조기 종료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급가속'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급변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재명 정부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통일부는 20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의 담화에 대한 공식 입장을 내고, 북한의 냉담한 반응에도 이번 훈련 축소를 북미대화 재개의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통일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연합연습 축소는 한반도에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결단"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통 큰 결단이 금년 내 북미 정상 간 대화 재개와 한반도의 안정적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평화의 역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북측도 이 기회에 함께 동참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0월29일 경북 경주시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어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로서 만든 평화의 기회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이자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로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북미정상회담 추진에 쉽게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강력한 핵무기 57개"가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비핵화 의제를 계속 추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미대화가 재개되더라도 한반도 비핵화보다 미국 본토를 향한 위협을 줄이는 '단기 성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쪽 복안이 어떠한 것이든, 문제는 북한이 미국 쪽의 '상당한 양보'가 없다는 회담장에 나설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북한은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결렬된 아픈 기억을 갖고 있으며, 특히 최근 북-러시아 관계의 회복과 북-중 관계의 강화로 경제적 고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황이다. 요컨대 몸값이 2019년 당시보다 크게 올랐다. 김정은 위원장이 특별한 소득 없이 트럼프 대통령의 11월 중간선거에 도움이 될 북미정상회담에 나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이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구상은 북미대화 재개와 함께 이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