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그룹이 과거 조선과 정유 사업에 편중돼 겪었던 위기를 딛고 지주사 체제 전환 이후 사업구조 다변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최근 역대급 호실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은 과거의 위기를 반면교사 삼아 단기 성과를 경계하고 장기적 관점의 오너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HD현대그룹이 특수선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 가운데 까다로운 해외로의 수출 문턱을 넘고 꾸준한 이익 창출을 통한 투자 여력 확보가 정 회장의 경영성과를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정기선 HD현대그룹 회장이 2026년 1월5일 경기 성남시 판교 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오프닝 2026'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HD현대
◆ 지주사 체제 전환 9주년 앞둬, 아픈 경험 이후 구조개편 안착
8월19일 신용평가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HD현대그룹은 위기 이후 지주사로 체제를 전환한 뒤 사업구조를 다변화하는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2026년 8월로 HD현대그룹은 HD현대의 전신인 현대로보틱스가 HD현대그룹 지주사로 첫발을 내디딘 지 9년째를 맞이한다. HD현대는 2017년 8월31일 공식 출범식을 열었다.
당시 HD현대그룹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것은 조선과 정유로 구성된 양대 사업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각 사업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HD현대그룹은 2010년대 중반 상선 시황의 회복이 느린 가운데 유가 하락이 해양 프로젝트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면서 조선 사업에서 원가 부담 및 수주 감소에 동시에 직면했다.
당시 정유 사업은 수송용 석유제품 수요와 정제마진 확대에 힘입어 낮은 유가에도 이익을 거뒀지만 이 성과 만으로는 조선 사업의 손실을 상쇄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분석된다.
당시 HD현대그룹 연간 영업손익을 보면 2014년과 2015년 모두 각각 영업손실 2조9천억 원, 1조3천억 원을 냈다. 이에 보유 주식 및 부동산 등 비핵심자산 매각, 인력 및 고정비 절감 등 3조5천억 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이행하고 지주사 체제 전환에 돌입했다.
이후 HD현대그룹은 전력기기, 건설기계 등을 포함해 여러 사업들을 별도 법인화하면서 지주사가 주요 사업법인을 관리하는 구조에 들어섰다.
이서진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18일 HD현대그룹 분석보고서에서 “자구계획 이후 추진된 2017년 지주사 체제 전환 및 사업 분할은 기존 사업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출발점이 됐다”며 “과거 조선과 정유에 집중됐던 그룹 이익창출 기반도 점차 다변화하고 이익 기여가 고루 확대되며 긍정적 결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 역대급 실적에서 정기선은 ‘혹독한 경험’을 언급했다, 오너경영의 무게감
외부의 긍정적 평가와 함께 HD현대가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 회장은 과거의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HD현대는 2025년 연결기준 매출 71조 원, 영업이익 6조1천억 원의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가장 최근인 2분기에도 매출 22조 원, 영업이익 4조1천억 원으로 분기 기준 가장 많은 경영실적을 거뒀다.
HD현대그룹은 조선과 정유 모두 수년 동안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고 건설기계 사업도 3대 핵심 축 가운데 하나로 구축했다.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현 HD건설기계)를 인수하면서 그 해 건설기계 부문 외형을 크게 확대했고 꾸준히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전력기기 사업을 담당하는 HD현대일렉트릭도 2026년 영업이익 ‘1조 클럽’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정 회장은 13일 경기 성남시 판교 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우리는 눈앞의 실적에 집착하다 시장의 변화를 읽지 못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고 돌아봤다.
정 회장이 과거의 아픈 경험을 언급하는 것은 오너경영인으로서 현재의 실적보다 앞으로의 성장 기반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과거 지주사 출범 직후 HD현대 대표에 전문경영인인 권오갑 회장이 올랐고 9년이 지난 지금은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맏아들인 정 회장이 그룹 경영을 이끌고 있다. 그 사이 사업구조 재편만큼이나 큰 변화가 리더십의 변화인 셈이다.
이에 정 회장은 호실적에도 경계심을 놓지 않고 미래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 회장은 사장단 회의에서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10년, 20년 장기적 안목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 수 있는 경영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메시지를 던졌다.
◆ 특수선·데이터센터 기회는 많아, 수출 문턱 넘기·꾸준한 이익창출이 성장 가른다
정 회장은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특수선 시장 확대, 인공지능(AI) 시대 도래와 함께 생긴 데이터센터 인프라 시장에서 HD현대그룹의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수년 동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이란의 중동 전쟁 등이 이어지면서 글로벌 전반에서 방위력 확충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각국의 전력증강 계획이 장기적으로 구체화하면서 해군 함정의 발주가 확대되고 있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함정을 건조했고 군수지원함, 호위함 등의 수출 실적도 보유하고 있다. 국방부 자료 등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은 대형급 수상함으로 구축함 8척과 호위함 12척을 인도했거나 건조하고 있고 잠수함은 7척을 건조했다. 또 2025년 12월 중형선 건조에 특화한 HD현대미포와 합병을 통해 특수선 생산기반을 확대할 밑바탕을 갖추기도 했다.
AI 데이터센터를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도 HD현대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나온다. HD현대중공업은 자체 개발한 중형엔진인 ‘힘센엔진’을 앞세워 최근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용 발전설비 누적 수주 규모를 1조 원으로 확대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데이터센터발 전력기기 호황에 풍부한 일감을 쌓고 있다.
다만 특수선 분야에서는 해외 수출 문턱을 넘는 것, 데이터센터 인프라 부문에서는 지속적 투자를 뒷받침할 꾸준한 수익성 확보가 정 회장의 숙제로 남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함정 등 특수선 사업은 글로벌 시장 공략이 향후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HD현대중공업이 한화오션과 손잡고 도전했던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프로젝트(CPSP) 수주전에서 고배를 마신 일처럼 방산 분야에서 세계 무대 진출은 녹록지 않은 도전으로 평가된다.
데이터센터 인프라 사업에서는 지속적 생산설비 증설로 수요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둔 일감을 이익으로 창출해 꾸준한 투자여력을 갖추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HD현대그룹 조선 중간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은 7월29일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급증하는 시장 수요에 기반해 엔진 생산능력 증설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2억 달러(약 2700억 원)를 들여 미국 앨라배마공장 증설을 진행하고 있다.
이서진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오랜 기간 축적해 온 경쟁력을 선보일 기회를 넓히고 있지만 특수선 분야 수출의 진입장벽은 높다”며 “엔진과 전력기기와 엔진 부문의 생산능력 확충도 실적 전환에 앞서 투자 부담을 발생시키는 만큼 현금창출을 통해 재무부담을 안정적으로 통제할 때 신용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