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두려움은 미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그렇게나 많이 발견되었다던 여러 심령 현상, 괴물, 외계인 등은 오늘날 사람들 손마다 카메라를 쥐여줬더니 귀신같이 사라졌다.
의학도 과학이 도입되면서 각종 사이비 치료법이 퇴출되고 환자들이 이상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발전하는 과학은 그 자체가 대중에게 불가해한 영역이 되며 새로운 미지의 두려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임신부에게 입덧약은 기형아를 출산할까봐 고민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AI 이미지
태아 기형을 유발하는 원인 중 약물이 차지하는 부분은 사실 전체의 1% 이하라고 한다. 그러나, 산모 개개인은 다른 원인은 무시하고 약물의 위험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 약도 먹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조차 태아 기형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 확률은 대략 3% 정도로 알려져 있다. 즉, 어떤 약을 먹은 산모 중 3%가 태아 기형이 발생했다면 해당 약은 사실상 태아 기형에 미치는 영향이 없는 수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산모는 그 3%가 약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가끔은 큰 사고도 터졌다. 동물 실험에서는 안전한 약이었던 탈리도마이드가 실사용에선 심각한 기형아를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니!
그런 대형 사건이 발생하면 대중의 두려움은 극에 달하고 다른 약 또한 신뢰가 손상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약도 있었다. 현재 안심하며 사용하고 있는 입덧 치료제의 선조인 '벤덱틴'이 그랬다.
벤덱틴은 독시라민(Doxylamine)과 피리독신(Pyridoxine)의 혼합물로 1956년에 출시되었다. 피리독신은 '비타민 B6'라서 기존에도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독시라민은 항히스타민제로 졸음을 유발할 수 있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산모는 입덧으로 잠을 못 이루곤 해서 졸음은 치료 효과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었다. 처음 출시 땐 디시클로민(Dicyclomine)이라는 위장 진경제 성분도 포함되었으나, 1976년에 입덧에 효과가 없다고 분석되어 빠졌다.
탈리도마이드도 1957년에 출시되어 두 약은 같은 시대에 입덧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둘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탈리도마이드가 최악의 사고로 1962년에 철수된 후 '입덧약'에 대한 사회적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벤덱틴 또한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선천성 기형아를 출산한 일부 산모들은 벤덱틴을 원인으로 지목하며 대규모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의학계의 대규모 역학 조사에서 벤덱틴은 기형과의 인과관계가 없다고 증명되었지만, 제약사인 메렐 다우(Merrell Dow)는 막대한 법적 소송 비용과 부정적인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1983년 자발적으로 판매를 중단했다.
벤덱틴을 놓고 벌어진 희대의 법적 공방은 의료계뿐 아니라 법조계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다우버트 대 메렐 다우 제약회사 사건'이다.
제이슨 다우버트(Jason Doubert)와 에릭 슐러(Eric Schuller)는 심각한 선천적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과 부모는 기형의 원인이 임신 중 복용했던 벤덱틴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제약회사를 고소했다.
당시 제약회사는 벤덱틴이 태아 기형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공식 출판된 인간 대상 대규모 역학 조사 논문을 증거로 제출했다. 반면, 다우버트 측은 공식 학계에서 검증되거나 출판되지 않은 자체적인 데이터 재분석 결과, 동물 실험, 분자 구조 분석을 근거로 내세우는 전문가 증인들을 동원했다.
당시 법원에서 과학적 증거를 인정하는 기준은 "과학계의 '일반적 인정’을 얻었는가?"였다. '거짓말 탐지기' 같은 유사 과학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프라이 기준(Frye Standard)'이다. 과학 증거의 신뢰성 판단을 학계에 맡기는 셈이다.
다만, 새로운 기술과 이론은 학계에서 대세로 인정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다우버트 측은 본인의 과학 증거를 판사가 직접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며 항소했다.
연방대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며 프라이 기준을 폐기하고 '다우버트 기준(Daubert Standard)'를 만들었다. 다우버트 기준은 과학 전문가 증언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도출된 것인지 '판사가 판단'하며, 이를 위한 판단 기준을 설정했다.
원고는 새로운 판단 기준이 도입되면 본인의 증거가 인정되기 유리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해당 증거는 새로운 기준으로도 과학 증거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심지어 원고의 핵심 증인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산과 전문의 윌리엄 맥브라이드(William McBride)는 탈리도마이드의 기형 발생을 보고했던 영웅이었으나, 해당 사건에선 '벤덱틴이 태아 기형을 유발한다'라는 주장을 위해 고의로 연구 자료를 위조한 게 밝혀져 의사 면허가 취소되기까지 했다. 결국 원고는 본인의 이름을 딴 새로운 법적 기준을 만들었음에도 1993년 최종 패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벤덱틴은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약은 이미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입덧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임산부 비율이 2배로 급증하는 등 산모들이 치료 기회를 잃는 사회적 부작용이 발생했다. 결국 동일 성분의 약이 2013년에 FDA 승인을 받고 다시 출시되어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가장 안전한 기적의 신약으로 홍보되었으나, 불명예스러운 흑역사를 남기고 퇴출당한 탈리도마이드. 억울한 누명과 수많은 소송으로 철수하였으나, 후에 안정성을 입증하고 명예를 되찾은 벤덱틴.
상반된 운명의 두 약은 의료계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남겼다. 산모가 먹는 입덧약 하나에 수많은 이들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작은 알약이 절대 가볍지 않다는 걸 느낀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