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클러스터,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미래 먹거리 사업인 '3대 메가 프로젝트'의 전력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원전의 고질적 난제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핵연료) 처리'에 대한 뚜렷한 해법은 내놓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의 원전 확대 구상이 결국 '화장실 없는 아파트'을 짓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4일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정부는 전문가 의견 수렴과 대국민 공론화를 거쳐 신규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 도입 여부를 결정하고 이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반영한다.
서남권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 등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 후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11차 전기본에 따라 추진되는 대형 원전 2기와 SMR 1기에 더해 추가로 원전을 더 짓는 방안을 거론해 왔는데 공식적인 정부 방침으로 확정한 것이다.
김 장관은 13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용인과 호남 반도체 산단, 그리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확정적으로 늘어날 전기 수요만 약 30GW(기가와트)이고, 잠재 수요까지 합하면 40GW가 넘는다"며 "여기에 내연차의 전기차 전환 등을 더하면 2040년까지 약 50GW 이상의 전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24시간 끊임없이 가동되어야 하는 첨단 미래 산업의 특성상 안정적 무탄소 기저전력으로 원전을 선택한 것은 불가피하다는 취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 장관이 제시한 폭발적인 전력 수요 예측은 '원전 확대 불가피론'의 강력한 근거로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전력 공급 청사진의 이면에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핵연료)'이라는 미완의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당장 5년 뒤인 2031년부터 국내 원전 내부의 임시 저장시설(습식 저장조)이 차례대로 포화 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경북 울진의 한울원전은 2031년, 부산의 고리원전은 2032년 저장 공간이 가득 찬다.
김현권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에 출연해 "사용후핵연료 저장 수조가 여유 공간이 있어야 되는데 꽉 차버리면 핵 발전을 중지시켜야 된다"며 "원자로를 가동할 수 없는 조건이 발생해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신규 원전 건설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전력을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지만 정작 현실은 사용후핵연료의 최종 처분시설이 아직 확보되지 않아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의 가동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제정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특별법령을 통해 영구처분시설 마련 전까지 원전 부지 내에 건식 저장시설을 지어 임시 보관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원전 인근 지자체와 주민들은 영구처분장 확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 임시 시설이 사실상 '영구 핵폐기장'으로 고착화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갈등을 키운 것은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주민 의견 수렴 및 지원 범위를 원전 반경 5km 이내로 제한한 점이다. 방사능 재난 시 위험 반경인 '방사선비상계획구역(원전 반경 30km)' 내에 살면서도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주민들의 분노는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다.
핵발전소지역대책협의회와 탈핵법률가 모임 해바라기 등이 1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헌법소원 심판청구 제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부산(고리)·울산(새울)·경주(월성)·영광(한빛)·울진(한울) 등 전국 원전 인근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단체 회원 284명은 2025년 12월 "정부가 주민들의 환경권과 생명권을 침해했다"며 국회와 대통령을 상대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황분희 청구인 대표는 당시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에서 "고준위방폐물법은 말만 임시저장시설이지 실제로는 원전 부지마다 핵폐기장을 허용한 법"이라며 "왜 원전지역 주민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외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정부의 신규 원전 속도전에 대한 우려가 더욱 크다.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폐장 건설 단계에 진입한 핀란드나 스웨덴의 경우 부지 선정부터 최종 건설까지 최소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철저한 지질 조사는 물론 주민투표와 지방정부 동의, 단계별 인허가 등을 거쳐 사회적 신뢰를 축적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영구 방폐장 건설을 위한 첫삽은커녕 사회적 합의를 위한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 상태다. 원전 폐기물 처분 대책 없이 원전 숫자만 늘릴 경우 향후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갈등이라는 부메랑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 6월 발간한 '북유럽 국가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도입 사례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처분시설 운영 주체와 지역주민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다양한 비(非) 재정적 수단을 통해 지역사회의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결국 '화장실 없는 아파트'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 속도에 맞춰 방폐물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로드맵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 위원장은 "필요한 시설이라는 점은 인정해도 내 지역은 안 된다는 이른바 '님비 현상'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난다"라며 "고준위 처분장을 단순히 폐기물을 묻는 시설로만 볼 것이 아니라 원자력 연구와 에너지 산업 클러스터와 연계해 지역의 장기 발전 전략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