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 일본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서 원자력 발전(원전) 바람이 불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원전을 외면하거나 축소해온 나라들이 잇따라 신규 원전 건설과 재도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안보 위기에 더해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수요 급증까지 겹치면서 원전이 '미래 핵심 에너지'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 간사이전력 원자력 발전소. ⓒ 교도통신=연합뉴스
4일(현지시각) 이탈리아 ANSA통신를 비롯한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이탈리아 하원은 원전 재도입을 위한 기본법안을 찬성 155표, 반대 86표, 기권 8표로 통과시켰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원전 재도입 기본법안은 다음 단계로 상원 표결을 거쳐 최종 확정되게 된다.
이탈리아는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원전을 전면적으로 폐쇄한 세계 최초의 탈원전 국가였다. 약 40년간 전력 상당부분을 프랑스를 비롯한 인접나라에서 수입해온 이탈리아는 에너지 안보강화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원전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다. 같은 날(4일) 일본 정부도 2040년대까지 최대 5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뒤 '원전축소' 노선을 걸어왔지만, AI와 반도체 산업의 폭증하는 전력수요를 재생에너지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에너지 기본계획을 전면 개편했다.
일본은 2040년대까지 기존 노후 원전을 대체하는 신규 원전 2~5기를 건설하고, 2050년대까지는 추가로 9기를 더 지어 모두 11~14기의 신규 원전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내놨다.
원전강국 프랑스와 원전공백 깬 영국도 '원전확대'로 방향 잡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는 전통적 원전강국으로 탈원전을 추진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전체 전력 수요의 약 70%를 원자력으로 충당해왔는데 2026년 2월 '제3차 국가 에너지 다년도 계획(PPE3)'을 확정하면서 원전 재도약을 더욱 가속화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는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법제화하고, 향후 원전 8기를 추가로 짓는 방안도 옵션으로 남겨뒀다. 기존 원전의 운전기간도 최대 50~60년까지 연장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원전중심으로 달성하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영국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신규 원전 건설공백을 깨고 본격적으로 원전 확장에 나서고 있다. 영국은 1956년 세계 최초로 상업원전을 가동하기 시작했지만, 1995년 준공된 사이즈웰B 원전 이후 신규 원전을 세우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2025년 6월 잉글랜드 동부 서퍽지역에 원전을 건설하기로 발표하면서 원전 재확장에 신호탄을 쐈다. 영국은 이 정책에 약 142억 파운드(한화 약 30조 원)를 투입하기로 했고 최종 승인 금액으로는 약 380억 파운드(약 78조8천억 원)가 책정됐다. 또한 영국은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에도 25억 파운드(약 5조2천억 원)를 추가 배정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이번 원전 확장정책으로 일자리 창출효과가 1만 개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원전이 성공적으로 준공되면 약 60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반면 독일은 여전히 이런 원전확장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다.
독일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을 선언한 바 있다. 2023년 4월 마지막 원전 3기 가동을 중단한 뒤 현재까지는 '원전 없는 나라'로 남아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2026년 3월 "탈원전은 전략적 실수였다"고 인정하면서도 "탈원전 정책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몇 년째 원전 해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를 벗어나 원전을 재가동하려면 신규 건설에 버금가는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독일 안에서도 여론이 바뀌고 있다.
독일 주간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 집권여당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최근 원전 재가동과 관련된 사회적 논의를 제안한 것으로 파악된다. 야당인 독일대안당(AfD)도 원전 재가동 안건을 여러 차례 독일 연방의회에 올리면서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처럼 주요 선진국들이 원전으로 돌아서거나 확대를 서두르는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수요 급증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 뒤 고조된 에너지 안보 위기, 그리고 탄소중립을 위한 탈탄소 전력원 확보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재생에너지만으로는 안정적 전력 확보가 어렵다는 현실적 인식이 강해지면서, 원자력은 '과거의 기술'이 아닌 '미래 에너지 안보의 핵심'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독일은 현재 탈원전 기조를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독일 여론의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 언제 그 기조에 균열이 생길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