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라는 단어는 내게 결코 가볍지 않다. 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일로 만난 사람들을 그저 단순한 '사회적 관계'라고 규정하기엔, 그 안의 역동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늘 관계에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결국 관계에 매달려 살았다. 멀어져도 마음이 쓰이고, 가까워져도 똑같이 힘들었다. 본래 인간관계에 그리 환상을 갖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회사 생활에서 가장 지치는 복병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관계'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허프포스트코리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회사 사람들을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본다.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하면 인생의 3분의1이 가시방석이다. 그렇다고 죽고 못 살 정도로 가까우면 모든 게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피를 나눈 가족도 오래 붙어 있으면 싸우고 가장 큰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루 8시간 넘게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과 '잘' 지내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그래서 내키지 않는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흡연실 따라나서기를 자처하며, 관심 없는 사내 동호회 문을 두드린다. 상사의 갑작스러운 저녁 제안에 결국 "네" 하고 따라서는 것도 모두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나만 정보에서 소외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과 '무리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만든 수동적 방어기제다. 평온한 일상과 탁월한 성과를 위해 사회적 관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지만, 이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는 사람을 참 피로하게 만든다.
진짜 지치는 것은 그다음 단계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쏟아붓는 각고의 적극적 노력 말이다. 마음이 맞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친해져야만 하는 사람'의 타이밍에 나를 맞추는 일은 고역이다.
내향성과 외향성(I와 E)이 반반씩 섞인 나로서는 상상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커피 약속을 잡으며 자로 잰 듯 인맥을 관리하는 이들을 보면 감탄이 나오지만, 내게는 애당초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노력의 영역이라기보다 타고난 성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직장에서 '친구'가 되기보다 솔직하고 투명한 동료,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멘토,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사가 되기로 했다. 직장에 절친한 친구가 생긴다고 해서 업무 효율이 극적으로 오르거나 회사 생활이 마냥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독이 되기도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건조하고 공식적이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하는 적당한 거리'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점이다. 너무 가까워져 사적인 선을 넘나드는 순간 경계경보가 켜진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관계가 본질적으로 지닌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냉정하게도 사회적 관계는 서로의 '효용가치'에 따라 온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자칫 타인의 인맥 관리 리스트 중 하나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올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미리 적당한 바리케이드를 쳤던 것 같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하물며 부모도 조건에 따라 자식을 대하는 결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에서 효용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리다.
결국 나는 거창한 인맥 관리를 잘하지도 못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는 핑계로 직장에서 친구가 아닌 '보통의 관계'를 지향하게 되었고, 역설적이게도 그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그러니 회사에서 친구를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가 서로에게 가장 안전하다. 사소한 일로 기대하고 상처받으며 결국엔 어디서 뒷담을 한다는 말이 들려오는 위태로운 친구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열린 마음으로 공평하게 진심을 다하고 친절한 말을 건네는' 동료가 훨씬 귀하다.
그러니 회사사람들과 굳이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거리두기만으로도 우리의 회사 생활은 충분히 건강하고 탁월할 수 있다.
글쓴이 조정열 전 에이블씨엔씨 대표이사는 K옥션, 갤러리현대, 쏘카, 한독, 에이블씨엔씨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예술, IT 플랫폼, 제약, 소비재 산업을 넘나들며 전문 경영인으로 일했다. 1991년 동서리서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마케팅 사관학교' 유니레버와 로레알 한국 지사에서 마케팅과 브랜딩을 담당하며 10년을 보냈다. 이후 MSD 한국 지사 사업부 담당, 피자헛 한국 지사 마케팅 담당으로 일하며 대표가 되기 전 10년간 임원 생활을 했다. 현재는 후배 경영인과 직장인의 멘토로, 예술계와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아트 프로모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전략보다 '지금, 여기'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