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매번 선거에 질 줄 알면서도 출근 인사를 나가는 민주당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무모하다 하고, 누군가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비웃는다.
홍주현 감독은 그들의 '성실하게 지는 과정'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가 본 것은 정치적 승패가 아니라, 고향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숭고함이었다.
당선 확률이 사실상 제로(0)임에도 2년마다 싸움을 반복하는 그들을 보며 세상은 "어차피 질 거 왜 나오느냐"고 묻는다. 홍주현 감독은 2022년과 2024년 총선에서 그들을 따라다니며 찍은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를 통해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허프포스트는 6일 오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홍 감독을 만나 세상이 무모하다고 바라보는 민주당 경북지역 정치인들에 대한 홍 감독의 생각을 들었다.
◆ 떠날 수 없는 경북, 그들에게 정치는 ‘생존’과 ‘고향 사랑’
홍 감독은 경북 지역 민주당 정치인들이 ‘생존’을 위해, 또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고향 사랑’을 위해 오늘도 뛰고 있다고 바라본다.
재정 자립도가 10%대에 불과한 도시에서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교부세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구조. 그 안에서 보수 정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짬짜미’와 ‘줄 세우기’. TK의 민주당 정치인들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은 주인공처럼 지역의 진실을 직면하고 이를 탈피하고자 현실에 뛰어들었다. 홍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동네가 문제가 있거나 안 좋으면 일산이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죠. 하지만 이분들에게 이곳은 본인들이 태어났고, 살고 있으며, 떠나지 않을 곳입니다. 서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정주(定住)의 정서'죠. 떠날 수 없기에, 내 집 앞마당이 망가지는 걸 볼 수 없기에, 그들은 지역을 변화시킬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고 결국 정치를 선택한 겁니다.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거죠.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을 먹은 것과 같아요. 우리 동네 예산이 어디로 새는지, 왜 멀쩡한 도로를 뒤집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양심상 모른 척할 수 없는 겁니다. 민주적 가치 같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자기 고향과 자기가 사는 집과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기 때문에 이분들은 그 선택을 하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 자체가 그냥 의미가 있는 거죠."
"우리는 늘 1등만 기억하지만, 매 순간 얼마나 성실하게 게임에 임해서 졌는가가 정말 중요합니다. 지는 과정이 성실한 사람은 매 순간순간이 이미 위너(Winner)입니다."
선거는 냉혹하다. 특히 선거에 패배한 후보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홍 감독이 선거에 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주목한 점은 흐트러짐 없는 그들의 태도였다. 홍 감독은 이를 "성실하게 지는 과정"이라 표현했다.
"아무도 손을 흔들어주지 않고, 악수를 받아주지 않아도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거리로 나갑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자리를 지키는 모습은 마치 '수행자' 같았어요. 우리는 늘 시상대에 오르는 1등만 기억하지만, 매 순간 얼마나 성실하게 게임에 임해서 졌는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지는 과정이 성실한 사람은 그 순간순간이 그냥 위너거든요."
◆ '경북의 왕언니'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경북의 선비' 김현권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에는 여러 후보들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인물은 경북 지역에서 그 누구보다 많이 실패를 맛본 임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남편인 김현권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위원장(전 민주당 의원)이다.
임 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경북 의성군 군의원을 시작으로 2010, 2018, 2022년 지방선거와 2024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김 위원장은 1998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2004, 2012, 2016, 2020, 2024년 국회의원 선거까지 비례대표 1번을 빼면 모두 낙선했다. 부부가 2년 마다 한 번씩 쓴 맛을 본 셈이다.
홍 감독은 두 사람을 '경북의 왕언니와 선비'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어떻게 이런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먼저 홍 감독은 임 의원의 최대 강점으로 호기심을 꼽았다. 보통의 정치인들이 상대 진영의 반대를 마주할 때 비난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면, 임 의원은 '진짜 이유'를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임 의원은 상대가 왜 반대하는지 성심성의껏 듣습니다. 비난을 섞지 않고 '진짜 이유'를 물으니 상대도 마음을 열고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말해주죠. 그 지점을 정확히 찾아 합의안을 도출해냅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조차 '임미애와 일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의 협치 능력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홍 감독이 본 임 의원은 단순히 '좋은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방향이 정해지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분석해 빠르게 밀고 나가는 '확신이 있는 전략가'다.
"매우 머리가 좋고 감각이 뛰어납니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고, 철저히 데이터에 기반해 움직이죠. 똑똑한 사람이 성실하기까지 한데 인간성도 좋으니,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영화 속 명장면 중 하나는 임 의원이 상대 진영의 유세차를 몸으로 막아서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대목이다. 평소 차분한 태도와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가 왜 그렇게 뜨겁게 폭발했을까? 홍 감독은 이를 '경북 민주당원들의 자존심' 문제로 해석했다.
"그건 단순한 몸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마라, 우리도 부당한 일에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걸 보여준 거죠. 후배들이 유세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자기가 앞장서서 방패가 돼준겁니다. '내가 막을 테니 너희는 끝까지 해라'라는, 그야말로 경북의 '왕언니'죠."
임 의원의 배우자이자 정치적 동지인 김현권 위원장을 두고 홍 감독은 ‘경북의 선비’라 불렀다. 지식인의 품격과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기개,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투박한 진심이 감독의 카메라에 담겼다.
"(김 위원장은) 옳은 건 옳다는 사람입니다. 권력자가, 혹은 동료 의원들이 불편해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정치권 안에서는 적이 많을지 몰라도, 그 진정성을 아는 유권자와 당원들은 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수학이나 물리를 따로 공부하지 않고도 서울대에 합격했을 정도로 수(數)와 통계에 천재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예산을 들여다볼 때, 어디서 돈이 새고 있고 어디를 막아야 시너지가 나는지 한눈에 파악해 냅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국가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험지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감독으로서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 민주당을 향한 고언 "어깨동무하는 정치도 필요하다"
경북의 선거운동 현장을 지켜본 홍 감독은 민주당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민주당이 경북이라는 험지에서 표를 얻으려면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는 '공격수 위주'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대를 포용의 대상으로 보고, 지역의 작은 커뮤니티 속으로 스며들어 '멸치볶음 잘 만드는 민주당원'이 되는 정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누구랑 싸우잖아요. 싸워서 막 시시비비를 가리잖아요. 그래서 맞고 틀림이 가려지면 옳은 사람은 기분이 좋지만 틀린 사람은 기분이 나빠요. 시비가 가려져서 저 사람을 무릎 꿇리는 순간 우정은 없어지는 거예요. 이 친구를 감싸는 그룹이 같이 있어야 돼요.
내란이 있었고 국민의힘이 뭘 잘못하고 있잖아요. 요목조목 따져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선택한 대통령이 바보 멍청이였다라는 걸 나중에 깨달은 저 사람 마음은 또 어떨까? 이걸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민주당은 멱살 잡는 법만 자꾸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김부겸 효과니 뭐니 하지만 이 사람들은 한 달이 아니라 이틀 만에도 뭉쳐요.
그리고 지역에 어머니 봉사단체, 무슨 건널목 무슨 단체, 무슨 급식 단체, 어디 배드민턴 탁구 크고 작은 동호회의 단톡방에 유언비어들이 엄청나게 다 돌아다닙니다. 근데 민주당은 지역의 작은 소모임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국민의힘을 지지하긴 하지만 결국 이 사람들은 노인들의 반찬을 막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지만 우리 동네 노인들은 이 사람들 때문에 그래도 하루에 한 끼는 제대로 반찬에다 밥을 먹어요. 그럼 그 행위는 좋은 거잖아요. 근데 이 사람들이 다 국민의힘 지지자라는 이유로 (민주당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반찬을 안 만들어요. 모든 모임들을 다 참여하지 않고 경시하거나 배타적으로 본다는 거예요."
◆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는 모든 이를 위한 위로
"인간의 삶은 누구나 다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내가 조금 불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어떤 태도로 경기에 임해야 하는가, 이 영화는 그 삶의 자세에 대한 서로의 마음을 묻는 질문입니다."
'빨간 나라를 보았니'는 분명히 정치를 다룬 영화다. 그런데 개봉 이후 관객들은 뜻밖에도 "내 삶을 돌아보게 됐다"는 평을 남긴다. 홍 감독은 이것이 바로 자신이 노린 '노림수'였다며 웃었다.
"인간의 삶은 다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누구는 유리하게 누구는 불리하게 그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단 말이죠. 어떤 사람은 힘이 좀 약하고, 머리가 좀 나쁘고, 시력이 좀 안 좋고, 임기응변이 좀 떨어지고, 이해력이 좀 떨어지고, 어떻게 하다가 성인 ADHD에 걸려요. 이런 사람들이 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경북의 민주당 분들이 어떤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그리고 그 삶의 태도와 자세가 결국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져야 될 삶의 태도와 자세라는 것을, 이런 걸 좀 알려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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