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총수 개인의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지출된 비용을 회사 비용으로 처리해 온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수사 대응 과정에서 사용한 법률 비용을 법인 손금으로 인정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기업이 총수 개인의 ‘방패’ 역할을 해온 구조에도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법적 리스크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법률 비용을 법인 손금으로 처리하려고 했으나 소송에서 패소했다. 이번 판결은 회사와 총수 개인의 책임 경계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롯데그룹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지난달 31일 코리아세븐, 롯데쇼핑, 롯데지주 등 15개 주요 계열사가 관할 세무서 10곳과 서울 지방 국세청을 상대로 제기한 법인세 등 부과처분 취소소송에서 1곳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의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다만 롯데쇼핑의 경우 회사 자체가 수사 대상에 포함된 점 등을 고려해 일부 비용만 예외적으로 인정됐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세무 판단을 넘어 회사와 총수 개인의 책임 경계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총수 개인의 리스크를 회사가 비용으로 흡수하는 관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기업 자원의 귀속 기준이 한층 엄격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 권한은 총수·책임은 회사, 구조에 제동
이번 사안의 핵심은 단순히 법률 비용 인정 여부를 넘어, 권한과 책임의 불균형 구조에 있다. 이번 판단은 그동안 대기업 집단에서 반복돼 온 총수 리스크의 비용을 조직이 흡수하는 관행에 사실상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대기업 집단에서는 총수가 그룹 전반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대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리스크나 비용은 계열사에 분산되는 구조가 반복돼 왔다. 다시 말해 권한은 총수에게 집중되고, 책임은 회사가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다.
롯데 계열사들도 국정농단 특검과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법률 비용을 회사 비용으로 처리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임직원 개인의 배임·횡령 등 범죄 혐의 대응 비용은 원칙적으로 회사 비용으로 볼 수 없다"며 "계열사들이 검찰의 수사에 대응하기 위해 법률 비용을 지출했더라도 이는 임직원 개인이 아닌 회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범위 내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는 개인과 회사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권한을 행사한 주체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 왜 내부거래·사익편취로 이어지나, 롯데 사례가 보여준 ‘구조의 작동 방식’
이러한 권한과 책임의 불균형은 법률 비용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구조가 유지될 경우 기업 자원의 배분 기준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다.
총수 중심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특정 계열사에 일감이 집중되거나 자금 지원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회사 자원이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에 맞물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회사가 곧 오너’라는 인식이 전제될수록 더욱 강화되며, 그 결과 자원 배분은 시장논리보다 지배구조 유지 논리에 따라 움직일 여지가 확대된다.
실제로 롯데그룹은 과거 내부거래와 일감 몰아주기를 둘러싸고 유사한 논란을 반복적으로 겪어왔다.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 특정 회사의 실적과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이를 지배력 강화로 연결하는 구조가 작동해온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이어져온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 결제단말기계열사 롯데피에스넷이 계열사 거래 과정에서 중간 계열사를 끼워 넣어 이익을 이전한 행위에 과징금 6억4900만 원을 부과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ATM(자동현금인출기)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롯데알미늄을 중간에 참여시켜 이른바 ‘통행세’를 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롯데알미늄은 ATM 제조사로부터 666억3500만 원에 기기를 매입한 뒤 이를 다시 롯데피에스넷에 707억8600만 원에 판매해 41억5100만 원가량의 차익을 얻었다. 반면 롯데피에스넷은 동일한 기기를 더 높은 가격에 구매하면서 비용 부담이 증가했다. 이는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해 특정 회사에 이익을 이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내부거래 중심 자원 배분 구조는 롯데정보통신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다. 이 회사는 총수 일가 지분이 24.77%에 달하는 비상장사로 사익편취 규제 대상에 포함됐으며, 내부거래 비중 역시 2016년 96.4%, 2017년 93.6%, 2018년 95.9%로 90%대를 상회했다.
특히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지정된 뒤 규제 해소를 위해 지배구조를 개편했지만, 그 이후에도 내부거래 매출은 2017년 1153억 원에서 2018년 6631억 원으로 1년 만에 6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2017년 물적분할과 합병을 통해 총수 일가가 보유하던 지분은 롯데지주로 이전됐고, 신 회장의 지주사 지분율도 2016년 8.78%에서 2017년 11.7%로 상승한 뒤 현재 약 13% 수준까지 확대됐다.
이는 내부거래 확대가 단기간 내 계열사 실적과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그 성과가 지주사 지분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계열사 간 거래를 통한 실적 개선이 지배력 강화로 연결되는 구조가 작동한 셈이다.
◆ 계열사 지원·투자 논쟁, “공동이익인가, 부담 전가인가”
이러한 구조는 내부거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사례를 보면 회사 자원이 특정 이해관계에 따라 배분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며, 동일한 왜곡이 계열사 간 자금 지원과 투자 결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총수 중심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그룹 전략이나 특정 계열사의 필요를 이유로 자금이 배분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는 수혜를 얻고, 다른 계열사는 재무적 부담을 떠안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이는 결국 내부거래와 마찬가지로 자원 배분의 기준이 시장 논리인지, 지배구조 유지 논리인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실제로 롯데그룹은 과거 부실 계열사였던 롯데피에스넷에 대한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배임 여부가 쟁점이 된 바 있다. 롯데피에스넷은 2012년 당시 이미 자본총계 마이너스 53억 원, 부채총계 792억 원 규모의 완전자본잠식 상태였음에도 계열사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해 390억 원가량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 주주들이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계열사들만 자금을 투입한 점 역시 ‘자율적 투자’인지 ‘그룹 차원의 의사결정’인지에 대한 논쟁이 제기됐다.
법원은 해당 사안을 그룹 차원의 공동 이익과 사업 전략을 고려한 ‘경영 판단’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계열사 간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 있는 상황에서, 특정 회사의 손실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뤄진 자금 지원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보다 비판적 시각을 내놨다. 경제개혁연대는 “계열사 간 끼워넣기나 부당지원이 공정거래법상 위법으로 판단됐음에도 형사 재판에서 배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총수가 회사를 개인 자원처럼 활용하는 구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동일한 자금 집행을 두고도 법원은 ‘경영 판단’으로, 시민단체는 ‘사익을 위한 자원 동원’으로 해석하면서 책임 귀속 기준에 대한 시각 차이가 드러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