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오월드와 국민들의 마음을 한바탕 뒤흔들었던 늑대, 늑구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포획 소식은 훈훈한 뉴스로 소비됐고 사람들은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사육사가 늑구 앞에 내놓은 먹이가 그릇 안에 담겨있지 않고 바닥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늑대 ‘늑구’가 대전 오월드에서 바닥에 놓인 고기를 먹고 있다. ⓒ 대전 오월드
"어떻게 밥그릇도 없이 바닥에 밥을 주느냐." "사육 환경이 너무 열악한 것 아니냐." 온라인은 금세 달아올랐다. 오월드 측은 즉각 해명에 나섰다. 늑대와 같은 포식동물은 먹이를 물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뜯어먹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동물복지 매뉴얼 상 바닥 급여를 권장한다는 것이다.
이 논란의 첫 번째 층위는 동물원을 향한 대중의 뿌리 깊은 편견이다. 현대의 동물원은 이미 단순한 유희용 전시관을 벗어났다. 물론 여전히 열악한 환경을 방치하는 일부 동물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수의 동물원은 멸종 위기종의 보전과 번식, 생태계 연구의 거점으로서 진화한 지 오래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낡은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동물원은 동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공간'이라는 선입견. 그 프레임을 끼고 바라보면 흙바닥 위의 고기 덩어리는 '행동풍부화'라는 전문가의 매뉴얼이 아니라 방치와 무관심의 증거로 보이게 된다.
동물복지와 관련된 논의는 분명히 필요하다. 오월드 역시 동물복지적 측면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시정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이 동물을 위한 일인지를 판단하는 그 시선 자체가 이미 인간의 것이라는 데 있다
이 논란을 단순한 동물 복지 차원의 논의가 아니라, 그 기저를 한층 더 파고들어 '선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중심주의의 민낯을 꺼내봐야 하는 이유다.
사람들이 바닥에 놓여 있는 고기를 보며 불편함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인 내가 보기에 비위생적이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의 행복마저 철저히 인간의 잣대로 재단한다. 늑대의 생태를, 그 야생의 본능을 이해하려는 시도 대신 인간의 식탁 예절을 자연의 포식자에게 투영한다. 이것은 공감이 아니라 공감의 탈을 쓴 인간중심적 사고다.
인간의 '오만한 선의'는 비단 동물원 울타리 안에서만 발동하지 않는다. 이 논리는 매해 봄, 전국의 등산로에서 훨씬 더 직접적 비극으로 반복된다.
산속에서 홀로 웅크린 아기 고라니, 수풀 사이에 가만히 엎드린 아기 너구리를 발견한 등산객들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며 품에 안고 산을 내려온다. 분명한 선의다. 인간의 시선에서 볼 때, 웅크리고 있는 새끼들은 마치 대형마트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는 아이처럼 보인다. 등산객들은 어미를 잃어버린-혹은 버림받은- 아이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하지만 야생의 진실은 인간의 상식과 다르다. 야생동물의 어미는 포식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새끼를 풀숲 깊은 곳에 숨겨두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새끼가 혼자 있는 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설계된 야생의 전략이다. 여기에 '인간의 렌즈'가 개입해 그 새끼들을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때, '구조'는 '납치'로 변한다. 순수한, 그러나 한없이 인간중심적인 동정심이 멀쩡한 생태계의 가족을 갈라놓는 폭력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진정한 연민은 타자를 나로 치환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들의 낯설고 때로는 불편한 방식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일, 우리의 선의를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질서를 바라보는 겸손에서 비롯된다. 가장 용기 있는 연민의 행위는 존중이다. 바닥 위의 고기를 그냥 두는 것이다. 풀숲 속의 새끼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조용히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자연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존재할 때 가장 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