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끝, 영하의 바람 속에서 한 남자가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최근 종영한 예능 프로그램 '극한84'에서 예능인 기안84는 결국 북극 마라톤 완주에 성공했다. 기록은 5시간 9분 54초. 순위보다 더 주목받은 건 “달리기는 나를 이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이었다.
이 장면은 시청자들의 강한 공감을 끌어냈다.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은 수도권 기준 가구 시청률 4.7%를 기록했고, 북극에서 마지막 러닝에 나서는 순간은 최고 시청률 7.1%까지 치솟았다. 이 장면은 단순한 예능의 감동을 넘어, 지금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롯데백화점이 이번 달 10일부터 19일까지 잠실 롯데월드몰 1층에서 러너들을 위한 팝업스토어 '러닝부트캠프'를 연다. ⓒ롯데백화점
달리기는 이제 기록 경쟁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개인의 선택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확산되며 하나의 집단적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까지 달리기 시작했을까.
배경에는 무엇보다 경제적 요인이 자리한다. 러닝은 특별한 장비나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 대표적인 ‘저비용 스포츠’다. 고물가와 소비 위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진입 장벽을 낮췄다.
실제로 1970년대 1차 석유파동 당시 미국에서도 유사한 러닝 붐이 나타났는데, 당시 뉴욕 로드 러너스 클럽 관계자는 한 외신(워싱턴포스트)과의 인터뷰에서 “비용 부담이 적어 소방관과 우편배달부, 비서 등 다양한 직군에서 참여가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웰니스 트렌드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문화가 결합하며 러닝은 단순 운동을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확장되고 있다. 팬데믹이 끝나고 건강 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운동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문화가 일상화됐다.
구독자 22만 명을 보유한 마라톤 유튜버 ‘마라닉TV’는 “코로나로 단절된 상황에서 SNS는 서로를 연결하는 창구가 됐고, 그 안에서 변화와 성장을 공유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며 “러닝은 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경제성과 문화적 확산이 맞물리며 러닝 인구가 급증하자, 산업 전반도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10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러닝 마케팅’은 단순한 제품 판매를 넘어 체험과 서비스 중심으로 전략이 이동하고 있다.
먼저 백화점 업계는 ‘체험형 공간’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러닝 팝업 ‘러닝 부트 캠프’를 열고 체험형 공간과 할인 판매를 결합했다. 러닝화·의류 전시는 물론, 도심 러닝과 트레일 러닝 프로그램까지 운영하며 오프라인 경험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역시 더 현대 서울에 ‘더 현대 러닝 클럽(TRC)’을 조성해 풋 스캔 기반 맞춤 상담 등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러닝 플랫폼’을 구축했다.
패션 플랫폼 역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무신사는 오프라인 매장에 러닝 특화 공간을 도입했고, W컨셉은 글로벌 전문 브랜드를 확대하며 소비자 취향 세분화에 대응하고 있다.
러닝은 이제 ‘생활 인프라’로도 확장되는 모습이다. BGF리테일이 운영하는 편의점 CU는 한강 인근 점포를 ‘러닝 특화 매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물품 보관, 탈의 공간, 휴식존 등을 갖춰 러너들이 운동 전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편의점이 단순 소비 공간에서 ‘운동 동선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식품·음료 업계 역시 ‘러닝 시장’ 공략에 나섰다. 롯데칠성음료는 전해질과 비타민 등 러너 맞춤형 기능성 음료로 특화된 ‘게토레이 런’을 내놨다. 쟈뎅과 일동후디스 등은 마라톤 대회 후원을 통해 에너지젤 등 스포츠 뉴트리션 제품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브랜드 마케팅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카스 라이트는 서울마라톤 현장에서 ‘피니시 라운지’를 운영하며 완주 경험을 ‘파티·인증·회복’으로 확장했다. 동아오츠카 역시 ‘포카리스웨트 스포츠 사이언스 존’을 통해 스트레칭과 급수 전략, 아이싱·마사지 등 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기능성 이미지를 강화했다.
러닝은 더 이상 개인의 운동이 아니다. 자기 이해의 과정이자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확장되면서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산업 전반에서도 ‘러닝 마케팅’은 소비·공간·서비스가 결합된 영역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