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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은 언제나 강력하다. 반박하는 순간 이상한 사람이 되기 쉽다. 유럽연합(EU)은 이 언어를 앞세워 수년간 국민들의 디지털 대화를 감시할 수 있는 법을 밀어붙여왔다. EU 채팅 통제법(Chat Control) 이야기다.

[허프 생각] 'EU 채팅 통제법안' 논란 확산 : '아이들을 위해' 명분에 가려진 디지털 감시의 위험성
아동 성학대 자료의 확산을 막는 것은 분명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국민의 사적 메시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하다. AI 이미지.

유럽연합은 2021년 아동 성학대 자료(CSAM)의 온라인 유포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사용자의 메시지를 스캔(검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임시규정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EU 채팅 통제법1.0’(Chat Control 1.0)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22년 5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플랫폼 기업의 자율에 맡기는 게 아니라, 모든 플랫폼이 의무적으로 전체 사용자의 메시지를 검사해야 한다는 ‘EU 채팅통제법안 2.0’(Chat Control 2.0)을 내놨다.

이 법안의 내용은 상당히 과감했다. 시그널(Signal), 왓츠앱(WhatsApp)같은 종단간 암호화 메신저도 예외 없이 강제 스캔(검열) 대상에 포함하고, 익명 메시지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조항도 들어갔다. 여기에 더해 앱을 사용하려면 신분증 제출 또는 얼굴인식으로 나이를 확인하는 '보편적 연령인증'을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단순히 아동 성학대 자료 차단을 넘어, 사실상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대화할 권리를 없애는 것이라 우려됐다. 언론인, 내부고발자, 성소수자,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처럼 익명통신이 절실한 사람들이 위협에 놓이게 됐다.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유럽연합은 전 국민 전수검열 강제조항을 논의 과정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빅테크 서비스 사업자가 스스로 위험을 평가하고 감시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은 살아남았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의회, 유럽연합 이사회 사이 삼자협상은 2026년 4월 기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이미 시행 중이던 임시규정(EU 채팅통제법 1.0)에서 먼저 균열이 생겼다.

유럽의회가 EU 채팅통제법 1.0의 연장안을 부결했다. 이에 2026년 4월 초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유럽연합 사용자의 사적 메시지를 자동 검열하는 행위는 전면 중단됐다.

IT 보안전문가들은 이 법안의 기술적 전제가 틀렸다고 지적한다. 미국에 본부를 둔 비영리공익단체 전자프라이버시정보센터(EPIC)을 비롯한 국제 인권 및 기술단체들은 유럽연합 이사회에 보낸 공동성명에서 "암호화를 훼손하는 어떤 제안도 철회돼야 한다"며 "법집행기관을 위해 백도어(뒷문)을 만들면 동시에 (해커나 권위주의 정부같은) 악의적 행위자들도 들여다 볼 여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허프 생각] 'EU 채팅 통제법안' 논란 확산 : '아이들을 위해' 명분에 가려진 디지털 감시의 위험성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2026년 3월 20일 금요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AP통신/연합뉴스

전문가들이 이렇게 우려를 제기하고 있음에도, 정작 이 법안을 주도하는 유럽연합 지도부에서 모순된 태도를 드러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네덜란드 탐사보도 매체 팔로우더머니(Follow the Money)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암호화 메신저 시그널의 메시지 자동삭제 기능을 켜놓고 사용한다고 보도했다.

독일 매체 헤이제(Heise)도 이를 확인하면서 "라이엔 위원장은 시그널 메신저에서 메시지 자동삭제를 미리 설정해두었다"며 "이는 그녀가 시민들에게는 감시를 강요하면서 본인은 추적 불가능한 암호화 통신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한 정치인의 개인적 위선이 아니다. EU 채팅통제법 논쟁 전반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EU 채팅통제법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한 가지다. 감시 법안은 한 번 부결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을 바꾸고, 명분을 다듬고, 다시 돌아온다.

한 번 구축된 감시 인프라는 순수하게 본연의 목적에만 쓰이지 않는다. 아동 성학대 자료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정치적 반대파 탄압이나 언론인 추적에 쓰일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해온 사실이다.

'아이들을 위해'라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말이 모든 사람의 디지털 프라이버시를 허무는 도구가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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