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4월, 가족들과 즐겁게 주말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공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는데, 운전석 문짝이 조금 파여 있고 정체불명의 페인트가 긁혀 있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메모 한 장 남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문콕'을 당했을 때에는 블랙박스와 CCTV 등 증거를 확보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중요하다. AI 이미지.
순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떨리는 손으로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봅니다. 다행히 옆에 주차하던 차량이 내 차를 시원하게 긁고 뻔뻔하게 도망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습니다. 도망가는 차량의 번호판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움켜쥐고 당장 인근 경찰서로 달려갑니다. 분통을 터뜨리며 당장 저 범인을 잡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영상을 확인한 경찰관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합니다. 오히려 화를 내는 나를 진정시키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소리를 합니다.
“선생님, 억울하신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건 무거운 형사처벌을 받는 '뺑소니'가 아닙니다. 단순 '물피도주'입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물피도주는 고작 범칙금 12만 원만 내면 전과도 남지 않고 끝난다고 합니다. 내 눈에는 명백한 범죄인데, 수백만 원의 수리비가 나와도 가해자가 받는 페널티가 고작 12만 원이라니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과연 가해자는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는 걸까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뺑소니'라는 단어와, 법률이 규정하는 '뺑소니'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 차이는 바로 사람이 다쳤는가(인적 피해)'에 있습니다.
법에서 말하는 진짜 뺑소니, 즉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상의 도주치상죄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사람이 탑승해 있는 차를 들이받고 구호 조치 없이 도망가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무거운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엄벌에 처합니다.
반면, 주차장에 세워둔 '빈 차'를 긁고 도망간 경우는 어떨까요? 사람이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다친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특가법상 뺑소니가 아니라, 도로교통법이 적용되는 '물피도주(물적 피해 도주)', 정확한 법률 용어로는 '주정차된 차량에 대한 사고 후 미조치'에 해당합니다.
물론 우리 도로교통법(제156조 제10호)도 이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주·정차된 차만 손괴하고 피해자에게 인적 사항을 제공하지 않은 채 도주한 사람에게 '2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엄연한 형벌 조항입니다.
일반적인 도로(골목길 포함)에서 물피도주를 했다면, 경찰 실무상 도로교통법의 통고처분 제도를 적용하여 승용차 기준 12만 원의 '범칙금'과 벌점 25점을 부과하는 선에서 끝납니다. 가해자가 범칙금을 납부하면 형사 입건을 피할 수 있어 소위 말하는 '전과'가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차가 긁힌 곳이 차단기가 있는 아파트나 대형 마트, 공원의 '주차장'이었다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행정처분인 범칙금과 벌점은 '도로'에서 운전했을 때만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차장과 같은 '도로 외의 곳'에서 발생한 물피도주에는 경찰이 12만 원짜리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할 수 없습니다. 행정처분으로 무마되지 않으니, 원칙대로 도로교통법 제156조 제10호가 곧바로 적용됩니다. 즉, 가해자는 20만 원 이하의 '벌금형(보통 구약식)'을 선고받고 범죄 수사경력조회에 기록이 남는 '전과자'가 됩니다.
”겨우 2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구요?“
형사처벌의 한계를 들으면 피해자분들은 허탈해하십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가해자에게 수갑을 채울 수는 없어도, 가해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묵직한 '민사적 책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을 묻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나 '경찰 신고'입니다.
경찰에 물피도주를 신고하는 진짜 목적은 가해자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국가의 수사력을 빌려 '가해자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특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이 블랙박스 영상만 가지고 차량 번호판을 조회하여 차주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경찰에 사고를 접수하면, 수사관이 블랙박스와 CCTV를 분석해 가해자를 찾아냅니다. 가해자가 특정되면, 경찰은 가해자에게 범칙금을 부과함과 동시에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보험 접수 번호나 연락처를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어디까지나 가해자의 동의하에 전달해주는 것이긴 합니다).
이렇게 가해자의 신원이 확보되었다면, 이제 본격적인 '금융 치료'의 시간입니다. 가해자가 순순히 보험 처리를 해주면 다행이지만, 배째라 식으로 나온다면 감정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든든한 우군인 '내 자동차 보험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구상권 청구' 제도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내 차의 '자기차량손해(자차)' 보험으로 먼저 완벽하게 수리합니다. 그러면 내 보험사가 수리비를 먼저 카센터에 지급한 뒤, 변호사를 선임하여 가해자나 가해자의 보험사를 상대로 끝까지 수리비를 받아냅니다. 얌체처럼 도망갔던 가해자는 경찰서에 불려 가 범칙금을 내고, 보험사의 구상권 청구에 시달리며 보험료 할증을 고스란히 감당하게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주차장에서 내 차가 긁힌 것을 발견한 직후에는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첫째, 블랙박스 전원부터 끄고 메모리 카드를 확보하세요. 블랙박스는 주행 영상이 누적되면 사고 당시의 귀중한 충격 영상이 지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현장 사진과 주변 CCTV 위치를 확인하여 증거를 수집하세요. 내 차의 파손 부위와 전체적인 주차 위치를 찍어두고, 결정적 단서가 될 주변 CCTV 위치를 파악해 두어야 합니다.
셋째, 관리사무소 방문 후 경찰에 신고하세요. 주차장 관리사무소에 영상 보존을 요청한 뒤 관할 경찰서에 정식으로 사고 접수를 하시면 됩니다.
운전석 문짝에 난 스크래치를 보면 누구라도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본 것처럼, 도망간 가해자는 결국 법의 테두리 안에서 경찰의 처분과 보험사의 구상권 청구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테러를 당하셨더라도 너무 열받지 마시고 차분하게 '정산'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글쓴이 김승현 변호사는 법무법인 선인 파트너 변호사다. 한양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거제시에서 행정법률 자문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소송 현장을 누비며 법적 문제를 해결해 왔다. ‘승변’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는 뜻에서 그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복잡한 법전 속에 갇힌 법률 상식이 아니라, 당장 내 삶을 지켜주는 유용한 생활 법률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