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2주 휴전 발표 불과 몇 시간 만에 이스라엘군이 민간인 밀집 지역을 공습하면서 레바논 전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 중동 분쟁 영상을 올리는 뉴스 계정인 'ME24 - Middle East 24' 에 지난 8일 폭격 받은 후 슈메스타스 마을 묘지 현장 영상이 올라왔다. ⓒ 로이터/연합뉴스/ME24 - Middle East 24 엑스 계정
로이터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8일(현지시각) 사전 경고 없이 약 10분 만에 레바논 베이루트 중심부를 비롯해 베카 계곡과 남부 레바논 등 인구 밀집 지역을 포함한 최소 100곳 이상의 목표물을 폭격했다.
레바논 구조대원들이 9일(현지시각)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전날 이스라엘 공습으로 타격을 받은 건물 현장에서 잔해를 치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레바논 공중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이번 공습으로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16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최소 110명은 어린이·여성·노인 등으로 알려졌다. 이번 이스라엘 공습은 1990년 내전 종료 이후 레바논에서 발생한 가장 치명적인 민간인 살상 사례로 기록됐다.
레바논 베이루트 살림 살람 지역에서 공습 현장을 직접 목격한 파티마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8일(현지시각)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가 전했다.
"나는 노트북을 움켜쥐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곳은 말 그대로 종말(Apocalyptic)의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모든 곳이 피로 뒤덮여 있었다. 수많은 어른과 아이들이 다쳐 있는 것을 봤다. 조금 더 걸어가 봤지만 다른 동네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기 위해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 같은 날 공식 성명을 통해 "살상과 파괴의 규모가 실로 참혹하며 이러한 살육(Carnage)은 믿기 힘든 수준"이라고 이스라엘의 공습이 인도주의적 상식을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 군용기가 지난 8일(현지시간) 레바논 동부 바알베크 지구에 위치한 슈메스타르 마을의 묘지를 폭격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장례 행렬이 있었다. 중동 분쟁 영상을 빠르게 올리는 'ME24 - Middle East 24' 엑스 계정에 지난 8일 영상이 올라왔다. ⓒME24 - Middle East 24 엑스 계정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묘지마저 폭격의 예외는 아니었다. 레바논 국영 통신사 NNA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베카 계곡 슈메스타르 마을의 묘지 인근을 공습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 있던 조문객들 중 최소 10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소셜미디어 엑스(X) 계정에는 묘지 폭격 이후 현장을 담은 영상도 게시됐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베이루트 중심부와 해안 산책로인 코르니슈 등 평소 민간인 왕래가 빈번한 지역까지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퇴근길 시민과 인근 주민들의 인명 피해가 속출했다. 외신들은 휴전의 희망이 순식간에 학살로 변해버린 이날을 '검은 수요일'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스라엘군은 남부 레바논과 주요 거점을 잇는 마지막 교량마저 파괴했는데, 이를 두고 피난길에 오른 민간인들의 유일한 통로를 고의로 봉쇄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여기에 병원 인근에까지 폭격이 가해지면서 의료 시스템마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며 인도주의적 위기가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은 이번 공격이 헤즈볼라의 지휘통제센터 등 주요 거점을 겨냥한 작전명 '영원한 어둠(Operation Eternal Darkness)'의 일환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미국과 이란 간 휴전 합의는 레바논, 즉 헤즈볼라와의 전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조장했다.
이번 폭격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사이 장기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헤즈볼라가 팔레스타인 연대를 명분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국경 충돌이 본격화됐다. 이에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거점 공습이 이어지며 교전이 확대됐다. 이후 양측은 공격을 주고받는 양상을 지속해왔다. 여기에 미국과 이란 간 전쟁 구도까지 더해지며,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와 미국-이스라엘 동맹 간 대리전 양상으로 확산되며 충돌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 교외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이 9일(현지시간) 베이루트의 서머랜드 해변으로 대피했다. ⓒAFP/연합뉴스
현재 레바논 인구의 약 5분의 1, 약 120만 명이 집을 떠나 피난 중인 상황이다. 이번 폭격은 레바논이 휴전 대상에 포함되는지를 두고 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피난에서 돌아가려던 일부 주민들이 귀향하는 시점에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애그니스 두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레바논 대표는 8일(현지시간) "레바논 전역의 사람들은 휴전 합의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공습의 물결이 나라를 공포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며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순간을 기대하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거리와 병원으로 뛰쳐나가 실종된 가족을 찾거나 점점 더 멀어지는 안전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같은 날 성명을 통해 "어떠한 포괄적 합의도 민간인의 안전, 보호, 존엄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며 "5주간 이어진 적대 행위 이후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부터의 휴식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