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의 에볼라 바이러스 사태가 심상치 않은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가 세계보건기구(WHO)의 늑장 대응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WHO 탈퇴 선언과 해외 원조 삭감이 국제 감염병 대응 역량을 약화시키며 사태 대응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콩고에서 에볼라 환자를 이송하는 의료진. ⓒAP=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민주콩고 보건부에 따르면 현재 자국 내 에볼라 의심 사례는 670건, 관련 사망자는 160명으로 집계됐다. 다만 검사 시설과 장비 부족 등의 문제로 실제 확진 판정을 받은 사례는 현재까지 61건에 그치고 있다.
현지에서는 방역 조치를 둘러싼 주민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민주콩고 보건 당국은 에볼라 확산을 막기 위해 사망자 장례 절차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지역 사회의 불신과 반감이 충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이번 확산 진원지 중 하나인 북동부 이투리주 르왐파라에서는 에볼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지역 축구선수의 유족과 친구들이 시신을 즉시 수습하지 못하게 되자 강하게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에볼라 치료소 텐트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감염자의 혈액과 체액, 토사물 또는 이에 오염된 물체와 직접 접촉할 경우 전파된다. 특히 장례 과정에서 시신을 만지다 감염되는 사례가 적지 않아, 보건 당국은 의심 환자의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해당 선수가 에볼라가 아닌 다른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했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상황이 격화되자 경고 사격까지 하며 대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민주콩고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후 민주콩고는 지금까지 17차례나 에볼라 발병을 겪었으며, 특히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대유행 당시에는 2299명이 사망했다.
이번에 확산 중인 바이러스는 '분디부교(Bundibugyo) 바이러스'의 변종으로 알려졌다. 이는 비교적 치명률이 높은 자이르 변종과는 다른 계통이지만, 현재까지 승인된 백신이나 확립된 치료법이 없다.
이런 가운데 WHO를 탈퇴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사태를 두고 'WHO의 늑장 대응 때문에 피해가 커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제 보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WHO 탈퇴 선언과 해외 원조 축소가 국제 감염병 대응 체계를 약화시키며 결과적으로 초기 대응 지연을 키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WHO 내부 문건에는 첫 증상 발현부터 실험실 확진까지 4주의 '치명적 탐지 공백'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정부 역시 WHO보다 9일 늦게 발병 사실을 인지했는데, 이는 첫 사망자가 나온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지적과는 달리 과거 에볼라 대응 경험이 있는 역학자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가 현지 방역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그동안 아프리카 지역에서 구축해온 질병 감시 체계와 긴급 대응 네트워크가 크게 축소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는 검체가 적정 온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운반되면서 초기 진단이 늦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에는 국제개발처(USAID)가 이런 물류 지원을 담당해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WHO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USAID 축소 정책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검체 운반과 실험실 용품 공급, 접촉자 추적 지원 등이 상당 부분 중단됐고, 해외 원조 삭감의 여파로 WHO 역시 전체 인력의 약 20%를 감축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진다.
존스홉킨스 공중보건대학원의 면역학자 기기 그론발 교수는 영국 매체 가디언에 "WHO를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WHO는 제한된 자원과 심각한 치안 불안 속에서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브라운대 팬데믹센터의 제니퍼 누조 교수 역시 매체에 "과거 미국 정부는 민주콩고 같은 지역에서 감염병 징후가 포착되면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이번에는 방관자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