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강 회장은 최근 대국민 사과와 함께 농민신문사 회장직 등 겸직하고 있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수천만 원대의 숙박비, 농민신문사 회장 겸직에 따른 연봉 지급 등의 문제를 제기한 지 5일만이다.
강 회장은 사과와 함께 농협이라는 조직 자체의 문제점을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농협중앙회장을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만드는 기형적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개혁할 수 있을지와 관련해서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이 13일 농협중앙회 본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 회장이 농협 전체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비상근'이라는 제도의 허점, 1961년부터 이어진 관변단체의 유산, 그리고 농협 개혁을 방기해 온 정치권의 책임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비상근' 뒤에 숨은 제왕,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기형적 구조
이번 사태의 핵심 원인은 2009년 농협법 개정 당시 도입된 '비상근 회장' 제도의 역설에 있다.
당시 정부와 국회는 중앙회장의 권한을 분산시킨다는 명분으로 회장직을 비상근 명예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책임 없는 제왕'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법적으로 비상근직인 회장은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에서 한 발 비껴나 있다. 하지만 인사권과 자금 배분 권한 등 조직을 장악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은 그대로 유지됐다. 권한과 책임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 셈이다.
특히 '보수'가 아닌 '실비'와 '수당' 명목으로 막대한 자금을 챙길 수 있는 구조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다.
농협중앙회장은 법적으로 연봉을 받지 않는 ‘무보수’ 직책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농민신문사 회장을 겸직하며 연봉을 챙겼으며 중앙회에서는 막대한 활동비를 수령해 연간 8억 원에 이르는 돈을 받아왔다.
강 회장은 이번 사과문에서 농민신문사 회장직 사퇴를 약속하고 규정을 초과하는 숙박비 4천만 원도 반납하겠다고 했지만, 중앙회에서 수령하는 약 3억9천만 원 규모의 활동비 반납이나 삭감에 대해서는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놓는 데 그쳤다.
◆ 관치금융의 유산과 지주사 체제의 모순, 견제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농협의 지배구조가 이토록 중앙회장 1인에게 집중된 것은 역사적 맥락과도 닿아있다.
농협중앙회는 1961년 군사정권 치하에서 국가 주도로 조직된 '관제 협동조합'으로 출발했다. 태생적으로 중앙회-시군조합-이동조합으로 이어지는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와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조직이다. 이러한 ‘관치’의 DNA는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마비시키고 회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2012년 단행된 사업구조 개편(신경분리) 역시 회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당시 사업구조 개편에서 농협은 1중앙회-2지주(농협경제지주, 농협금융지주) 체제로 전환됐다. 하지만 지주회사의 지분을 중앙회가 100% 보유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중앙회장이 사실상 금융지주와 경제지주 전체를 지배하는 '옥상옥' 구조가 완성됐다.
농협금융지주 등 계열사에 별도의 CEO와 이사회가 존재하지만 지분 100%를 쥔 중앙회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농협중앙회장이 행사하는 제왕적 권력의 또다른 핵심 고리는 바로 농협법 제130조다.
농협법 제 130조 1항은 “회장은 총회에서 선출하되, 회원인 조합의 조합원이어야 한다. 회원은 조합원 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조합원 수 3천 명)에 따라 투표권을 차등하여 두 표까지 행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대형 조합이 표를 독식해 중앙회장 선거가 지역 대형 조합장들의 잔치로 변질되게 만들었고, 소형 농촌 조합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강호동 회장이 당선된 2024년 1월 선거에서 선거인(조합장)은 모두 111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2표를 행사할 수 있는 선거인은 141명이었다. 즉 전체 1252표 가운데 282표(22.5%)가 대형 조합장들에게 달려있는 셈이다.
이러한 선출 방식은 회장이 당선되기 위해 소수의 대형 조합장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당선 후에는 보은 인사와 예산 지원으로 보답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 이권과 표 사이의 역학관계, 여의도 책임론도
한쪽에서는 강호동 회장 사태를 키운 가장 큰 책임은 결국 정치권에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가 농협의 기형적 구조를 알면서도 농협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농협 개혁에 소극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표 때문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지역 농협 조합장은 당락을 좌우하는 핵심 선거 조직책이다. 반대로 중앙회장은 십조 원이 넘는 자금 배분 권한을 쥐고 지역 조합장들을 통제한다.
국회의원은 지역 조합장의 눈치를 보고, 조합장은 중앙회장의 눈치를 보는 먹이사슬 속에서 농협 개혁 법안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농협중앙회장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추진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경영 연속성'을 이유로 현직 회장의 연임을 허용하는 농협법 개정안 처리를 시도했다. 개정안과 관련해 ‘농협의 역할 강화’와 ‘제왕적 회장의 견제’라는 두 가지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결국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산됐다.
◆ ‘진짜 개혁’하겠다는 농협중앙회, 개혁의 범위는 어디까지
최근 농협중앙회가 내놓은 개혁안과 관련해서는 ‘맥락’은 잘 짚었지만 실제 개혁의 추진과 관련해서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강호동 회장은 사과문과 함께 농협개혁위원회 출범을 약속했다. 농협개혁위원회는 중앙회장 선출방식과 지배구조, 농축협 조합장을 비롯한 임원의 선거제도 등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구조적 문제 중심으로 개선 과제를 도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조합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실제로 현재 농협의 기형적 구조를 만든 구조적 원인을 비교적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는 셈이다.
강 회장이 권력의 중심이었던 인사권 등을 내려놓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을 두고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강 회장은 사과문에서 “앞으로 인사를 비롯한 경영 전반에 대해서는 사업전담대표이사 등에게 맡기고 본연의 책무인 농업·농촌 발전과 농업인 권익 증진을 위한 활동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