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보수우파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산티아고 페냐 파라과이 대통령이 대형은행의 파산과 비리 연루 의혹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브라질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4선에 성공하고 미국 중간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이 패배한 데 이어 벌어진 일이다.
각자 다른 이유로 벌어진 일이지만, 미주 대륙을 휩쓸었던 우파 집권 물결인 '블루타이드(Blue Tide)'가 갑자기 힘을 잃고 있는 셈이다.
산티아고 페냐 전 파라과이 대통령(사진)이 2026년 11월5일(현지시각) 은행 비리의혹에 중도사임했다. ⓒ AP통신=연합뉴스
5일(현지시각) 영국 가디언과 AP통신을 비롯한 외신을 종합하면 페냐 대통령은 이날 영상 메시지를 통해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2023년 8월 취임한 페냐 대통령의 임기는 2028년까지였다.
페냐 대통령은 "국가의 안정과 사회적 평화, 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사임한다"며 "국민 여러분을 실망시켰다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다만 자신을 둘러싼 비리 의혹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퇴진은 파라과이의 대형 디지털 은행인 우에노 은행의 파산 사태가 직접적 계기가 됐다.
우에노 은행은 페냐 정부 출범 이후 급성장해 성인 인구의 약 60%에 해당하는 300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그러나 11월2일 중앙은행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은행의 정리 절차에 착수하면서 고객들의 예금 인출이 중단됐다.
식비와 생활비조차 찾지 못하게 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수도 아순시온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문제는 은행의 급성장 과정에 페냐 정부의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우에노 은행은 정부와 연금기관 등으로부터 8억~8억5천만 달러(한화 약 1조1천억 원)의 자금을 유치했다. 페냐 대통령은 과거 이 은행을 소유한 기업집단의 주주였으며, 취임 직후 우에노 은행장을 중앙은행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야권은 공적 자금이 대통령과 이해관계가 얽힌 민간 은행에 집중됐다며 탄핵을 추진했다. 여기에 페냐 대통령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오라시오 카르테스 전 대통령마저 탄핵 지지를 선언하면서 여당 내부의 방어선도 무너졌다.
카르테스 전 대통령은 11월5일 성명서에서 "우리는 공공 자금과 연금 수급자들의 돈을 훔치는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고 밝혔다. 결국 페냐 대통령은 탄핵안 심의 도중 사임했고, 하원은 사임 발표 이후에도 탄핵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번 사태는 파라과이 국내 정치에 그치지 않고 남미 우파진영에도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페냐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남미 동맹 가운데 한 명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 안보 협의체 '미주 방패'에도 참여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전략적 동반자로 평가했으며, 최근에도 양국은 핵심 광물과 경제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좌파성향의 룰라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미국에서는 민주당이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우파 진영의 정치적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여기에 파라과이의 친트럼프 우파 대통령까지 실각한 것이다.
세 사건은 발생 배경과 정치적 성격이 달라 하나의 흐름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남미에서 확산하던 보수우파의 집권 기세가 이전과 같지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