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영화 '엑스맨' 시리즈의 프로페서X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가 세상을 떠났다.
작품 속에서 영웅을 연기했던 그는 현실에서도 '히어로'였다. 배우로서 남긴 굵직한 족적과 함께, 스크린 밖에서도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 그의 삶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 ⓒ로이터=연합뉴스
29일(현지시각) AP통신에 따르면 스튜어트는 지난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6. 대변인에 따르면 그는 알츠하이머병과 루이소체 치매를 앓아왔으며, 가족들이 곁을 지킨 가운데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그동안 스튜어트의 구체적인 투병 사실은 공개되지 않았다.
■ 영국 노동자계급 출신 소년, 연극에서 꿈을 찾다
'엑스맨' 시리즈 중 프로페서X를 연기 중인 패트릭 스튜어트. ⓒ 20세기 폭스
1940년 영국 북부 요크셔주의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스튜어트는 12세 때 아마추어 연극단에 가입하며 연기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10대 시절에는 취미 삼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암기할 만큼 연극에 빠져들었다. 연극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1년간 가구 판매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17세에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브리스틀 올드 빅 연극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웠다. 오랜 기간 무대에서 내공을 쌓은 그는 1971년 '한여름 밤의 꿈'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주로 고전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를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하게 한 작품은 미국의 인기 SF 시리즈 '스타트렉'이었다. 다만 출연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세 무렵부터 대머리가 두드러졌던 스튜어트의 외모를 두고 우려가 제기되면서 캐스팅이 무산될 뻔했지만, '스타트렉 :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프로듀서가 그의 캐스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스튜어트는 1987년부터 프랑스 출신의 평화주의적 성향을 지닌 함장 장뤼크 피카르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다. 극 중 그가 자주 사용한 대사 '그렇게 하시오'(Make it so)는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에는 '엑스맨' 시리즈에서 돌연변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프로페서X를 연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프로페서X 역은 국내 관객에게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표적인 배역으로 남았다.
오랜 시간 두 작품의 상징적인 인물로 활약한 스튜어트는 2017년 개봉한 '로건'까지 프로페서X 역을 이어갔다. 2026년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 : 둠스데이'에도 특별출연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배우로서 쌓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았으며, 2010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 가정폭력의 상처 딛고 피해자 지원에 앞장서다
배우 패트릭 스튜어트은 생전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공익활동을 펼쳐왔다. ⓒ인스타그램
화려한 배우의 삶 이면에는 오랜 시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상처가 있었다. 스튜어트는 화장실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야 했다.
그가 여섯 살이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아버지 알프레드 스튜어트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술을 마신 뒤 화를 냈고, 부부간 언쟁이 격해지면 어머니 글래디스 스튜어트를 폭행했다. 스튜어트와 형 트레버 스튜어트는 부모의 말다툼이 폭력으로 번질 조짐을 살피는 데 익숙해졌으며, 폭행이 시작되면 방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어머니를 막아섰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스튜어트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가정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 상처를 오랫동안 혼자 짊어졌다. 80세가 넘은 나이에 정신적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수십 년간 치료를 이어갔다고 밝힐 만큼,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는 대신,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는 데 힘을 쏟았다. 국제앰네스티와는 2006년부터, 영국의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인 '리퓨지'(Refuge)와는 2007년부터 공식적으로 협력하며 피해자 지원 활동에 나섰다.
스튜어트는 국제앰네스티의 단편 영상에 출연해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했던 어린 시절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더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며, 가정폭력은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공공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감춰왔던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가정폭력을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스튜어트는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갔다. 2007년 '리퓨지'의 후원자가 된 그는 국제앰네스티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개한 지 몇 달 만에 이 단체로부터 연례 모금 행사의 진행을 요청받았고, 이후 주요 후원자로 활동했다. 2009년에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가정폭력이 우리 집을 어둡게 했다. 그래서 리퓨지를 지지한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피해자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1년 10월에는 BBC의 모금 프로그램 '라이프라인 어필'(Lifeline Appeal)에 출연해 리퓨지를 위한 기금 마련에 나섰으며, 전 남편에게 딸을 살해당한 여성의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관심은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난민 구호와 유럽·중동 지역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비롯해 교육, 각종 자선단체 후원, 동물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2013년 5월 말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팬 행사에서 한 관객이 "연기 외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스튜어트는 화려한 수상 경력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공개하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낸 일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