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안의 생태보호구역에 초호화 리조트와 별장 1만 채를 짓겠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구나 정부가 개발을 위해 보호구역 규제까지 풀어주고 건설 사업 뒤에는 미국 대통령의 사위가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유럽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10월19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9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 연관된 초호화 리조트 개발 계획을 서둘러 추진하면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유럽의회 의원들은 알바니아 정부가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를 피하려고 '교묘한(sneaky)'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네덜란드 출신 유럽의회 의원 티네커 스트리크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가 EU 환경 기준을 본격적으로 적용받기 전에 개발을 기정사실화하려 한다"며 "알바니아 정부가 환경영향평가를 서둘러 진행하는 방식으로 트럼프 일가와 관련된 대규모 관광개발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10월15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에 합류한 가운데,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 젊은 시위 참가자가 진압 경찰을 향해 플라스틱 병을 던지고 있다. ⓒAP/연합뉴스
알바니아에서는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이미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있다.
"알바니아는 팔리지 않는다(Albania is not for sale)."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거리에서 수개월째 울려 퍼지는 청년들의 구호다. 자연보호구역에 들어설 초호화 리조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시위는 이제 라마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확산됐다.
9월30일(현지시각)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를 공식 방문한 가운데, 정부 청사 앞에서 시위대가 손팻말을 들고 진압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플라밍고 혁명’으로 불리는 반정부 시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연관된 '해안 자연보호구역 내 초호화 리조트 개발사업'에 반발해 올해 5월 말 시작됐으며, 에디 라마 총리 정부를 겨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논란의 중심에는 알바니아 남서부 아드리아해 연안의 비오사-나르타 지역이 있다. 이탈리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이곳은 지중해에서 마지막까지 온전한 모습을 간직한 삼각주 생태계로 꼽힌다. 플라밍고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와 바다거북 등이 서식하는 생태적 요충지다.
문제는 이 일대에 추진되는 개발사업의 규모다. 개발계획에는 해안 지역에 최대 1만 채의 빌라를 건설하는 구상이 담겼다. 원래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됐던 곳이지만 알바니아 정부가 관련 법을 개정해 '전략적 투자자'의 개발을 허용하면서 길이 열렸다.
로이터는 지난 6월5일 쿠슈너의 투자회사 어피니티 파트너스가 비오사-나르타 습지 인근에서 추진되는 14억 유로(약 2조860억 원) 규모의 관광개발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 트럼프와 쿠슈너는 알바니아의 사잔섬 개발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알바니아 남서부의 비오사-나르타 습지는 수천 마리의 분홍빛 플라밍고가 찾아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개발 반대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플라밍고를 저항의 상징으로 내세우면서 시위는 '플라밍고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026년 10월16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문을 닫은 한 상점에 '우리는 학생들과 함께한다'는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로이터통신은 17일 알바니아 청년들의 시위가 부패와 일자리 부족, 정부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는 불만이 쌓이면서 폭발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한때 라마 총리가 직접 발탁했던 25세의 마르야나 코체쿠 의원까지 시위에 합류하면서 반정부 여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시위에 불을 붙인 것은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환경 훼손이었다. 지난 5월 개발 예정지에 중장비가 들어오고 진입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보존된 사구(모래 언덕)와 숲이 파괴된 사실이 드러났다. 자연을 지켜야 할 정부가 오히려 개발의 문을 열어줬다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처음 거리로 나온 것은 환경운동가와 지역 주민들이었다. 시위대는 보호구역에 서식하는 플라밍고 모형을 들고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위는 곧 부패와 불평등, 열악한 교육환경과 청년 실업에 대한 불만까지 끌어안으며 전국적인 반정부 운동으로 확산됐다.
10월18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도중 진압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수도 티라나에서는 학생들과 진압 경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부 부처 건물과 은행, 상업시설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시설물을 파손하거나 약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 등으로 대응했다.
로이터의 17일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시위 참가자 약 500명을 연행했으며 경찰관 120명과 시위대 45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했다.
리조트 개발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거리의 분노는 이제 라마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정권을 정조준하고 있다. 2013년부터 집권한 사회당 소속 라마 총리는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해 4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잇따른 부패 의혹과 경제적 불만 속에 집권 이후 가장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라마 총리는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10월13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교육부 청사 인근에서 진압 경찰이 시위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부상한 시위 참가자 한 명을 연행하고 있다. 이날 시위대는 에디 라마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플라밍고 혁명' 시위에 참여했다. ⓒAP/연합뉴스
이번 사태는 알바니아의 오랜 국가적 숙원인 EU 가입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알바니아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라마 총리는 관광산업 육성을 경제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2030년까지 EU에 가입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EU의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개발 못지않게 엄격한 환경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유럽의회는 지난 6월17일 알바니아 정부에 자연보호구역 개발을 허용한 법 조항을 폐지하고, EU 환경 기준에 부합할 때까지 보호구역 내 신규 인허가와 공사 등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환경보호는 EU 가입 과정에서 타협할 수 없는 조건이라 밝혔다.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가 9월30일(현지시각)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정부 청사에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반면 에디 라마 총리는 관광개발이 알바니아 경제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올 것이라며 환경영향평가 등 과학적 절차에 따라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쿠슈너 역시 개발사업이 높은 환경 기준을 충족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홍빛 플라밍고를 저항의 상징으로 내세운 알바니아 청년들의 요구는 자연보호를 넘어 정치적 변화로 확대되고 있다. 개발 과정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배제됐다는 불만이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번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