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메모리 공급병목으로 치솟고 있는 원가를 줄이기 위한 돌파구로 또다시 중국 반도체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
애플의 이런 움직임은 메모리 공급부족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을 끌어올리는 호재인 동시에 중국 기업들에는 시장 진입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고 있다.
중국 메모리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과 대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한편 차세대 기술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여기에 애플이라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까지 공급망 다변화에 나설 경우 중국 기업들의 성장 속도가 한층 빨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안팎에서는 애플의 중국 메모리 기업 활용 가능성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장 지위에 미칠 영향을 주목하고 있다. 중국 기업의 공급망 진입이 메모리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꿀 변수로 떠오른 가운데 실제 양산 능력과 고객사 인증, 수율 확보 여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압도적 기술 경쟁력과 시장 지위를 지켜낼 수 있을지를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CXMT 등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허프포스트코리아
16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D램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CXMT의 추격에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분기 글로벌 D램 시장은 삼성전자(38%), SK하이닉스(25%), 마이크론(24%) 등 ‘메모리3사’가 90% 가까운 매출 기준 점유율을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다만 이번 최신 집계에서는 중국 CXMT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2분기 매출 기준 CXMT의 D램 시장 점유율은 10%를 기록했다. 여전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격차가 크지만 CXMT 점유율의 상승세가 눈에 띈다. CXMT의 2분기 점유율은 직전 분기보다 2%포인트, 1년 전인 지난해 2분기와 비교하면 6%포인트 확대된 수치다.
앞서 7월 666억1천만 위안(약 13조4천억 원)을 조달하며 증시에 데뷔하는 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는 CXMT는 단순한 외형 확대뿐 아니라 기술 측면에서도 두 회사를 위협하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CXMT는 최근 차세대 D램 기술인 ‘포에프스퀘어(4F²)’를 올해 안에 상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4F²는 D램 셀을 더 작은 면적에 배치하도록 셀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반도체 회로를 더 미세하게 만들지 않아도 동일 면적에 배치할 수 있는 셀 수를 최대 50% 늘릴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CXMT가 4F² 기술의 고객사 품질 검증을 거치고 안정적 수율을 확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기술력에서 항상 뒤처져 있던 중국 기업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보다 차세대 기술을 먼저 상용화하겠다는 자신감을 나타낸 데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가 급락했는데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로 CXMT의 신기술 상용화 계획 발표가 꼽히기도 한다.
CXMT는 시장 점유율 측면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연간 아이폰 출하량이 2억5천만 대에 이르는 애플의 공급망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존 터너스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15일(현지시각) 공개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중국 기업의 메모리를 탑재하겠다는 점을 시사했다.
터너스 CEO는 “메모리 부문의 제약은 절대적 위기”라며 “모든 선택지를 탁자 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 근본적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고 덧붙였다.
터너스 CEO가 언급한 ‘모든 선택지’의 핵심은 CXMT를 비롯한 중국 메모리 기업으로 추정된다. 앞서 7월 초 블룸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CXMT와 메모리 구매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팀 쿡 애플 집행의장도 7월 말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중국 기업의 메모리를 구매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애플 측에서 중국 기업과 메모리 공급망 협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8월 애플을 겨냥해 “중국산 메모리 사용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한 가운데 터너스 CEO가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는 이번 발언은 정부를 설득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애플을 포함한 글로벌 세트 기업들의 메모리 공급부족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가격 협상력 강화와 수익성 개선으로 직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급병목이 심화하는 메모리 초호황에 힘입어 올해 600조 원, 내년 1천조 원 이상의 합산 연결기준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증설을 추진하고 있는 CXMT가 애플의 공급망에 편입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메모리 시장에서 제품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다.
CXMT가 애플과 손을 잡으면 중장기적으로도 반도체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7월 초 애플이 CXMT와 메모리 구매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뒤 류호승 KB증권 연구원은 “애플이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중국 기업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큰데 애플은 품질 및 안정성 기준이 높은 고객사인 만큼 중국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애플을 향한 공급은 단기 매출보다 제조역량 향상 효과가 더 크고 이에 따라 서버용 메모리와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투자도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다만 애플이 CXMT를 메모리 공급사로 선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현재 D램 시장에서 확보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요소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반도체를 포함한 여러 산업의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애플이 미국 정부 설득에 나섰지만 동의를 끌어내기는 녹록지 않은 셈이다.
게다가 이미 높아진 CXMT의 가격 협상력이 원가 절감을 노리는 애플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 언론 중국기금보에 따르면 CXMT는 애플의 메모리 가격 인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CXMT가 중국 IT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주문을 확보한 만큼 애플이 메모리 가격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기업들의 ‘반도체 굴기’가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CXMT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력을 추격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15일(현지시각) 야후파이낸스에 따르면 미국 투자은행 로젠블랫의 케빈 캐시디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CXMT의 차세대 D램 기술 상용화 계획을 ‘종이호랑이’라고 평가하면서 “시제품을 개발하는 것과 칩을 경쟁력 있는 비용으로 대량 생산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전날 삼성전자 분석보고서에서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은 단순한 신공정 개발이 아니라 안정적 대량 양산과 수율 확보, 고객사 인증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며 “중국의 기술 추격에 관한 시장의 우려는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애플 공급망에 진입한다면 중국 메모리 기업들은 확실히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며 “다만 실제로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기 때문에 단기간에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 수준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