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여름에는 폭염으로, 가을에는 거리 시위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혁명의 나라', '파업의 나라'로 불릴 만큼 거리의 저항이 익숙한 프랑스지만, 이번 시위는 심상치 않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분노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가운데, 눈덩이처럼 불어난 나랏빚과 정부의 재정 긴축 논란까지 겹치면서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 대립이 격화하고 정치권마저 분열된 사이, 극우 세력은 차기 집권을 노리고 있다. 자유·평등·박애를 국가적 가치로 내세우고 교육과 복지를 국가의 책무로 여겨온 프랑스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찜통 교실에 교사마저 부족, 거리로 터저 나온 학생들의 분노
학생들은 제대로 된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름이면 에어컨 없는 교실이 찜통으로 변했고, 겨울이면 부족한 난방에 몸을 떨어야 했다. 천장에서 빗물이 새고 시설물이 무너지는 학교도 있었다. 교사가 부족해 일부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고,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지는 긴 학교생활은 학생들의 불만을 키웠다.
참다못한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의 불씨는 지난 9월 파리 남동쪽 크레테유의 한 고등학교에서 지펴졌다. 교사 부족에 항의하는 목소리는 곧 파리 외곽과 지방 도시로 번져 나갔다. 대학생과 교사, 노동조합까지 가세하면서 시위는 교육 현장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AFP에 따르면 13일(현지시각)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시위에는 내무부 추산 16만1천500명, 노동조합 추산 48만 명이 참여했다. 교육부는 이날 전국 214개 학교가 문을 닫았다고 밝혔다. 스웨덴의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파리 외곽 생드니에서 시위에 동참해 힘을 보탰다.
시위가 격해지면서 곳곳에서 충돌도 빚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차량이 불타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누구나 집안 형편과 관계없이 평등한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학교도 모든 국민에게 공정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가난한 지역일수록 학교 시설은 낡고 교사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대학 입학 지원 시스템인 '파르쿠르쉬프' 역시 절차가 복잡하고 선발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학생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교육 문제만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랏빚, 교육에 쓸 돈은 어디로
학생들은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쓰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정부의 곳간 사정은 녹록지 않다.
프랑스 재무부가 지난 9월 19일 발표한 전망에 따르면 올해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119.3%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프랑스 경제가 1년 동안 만들어 내는 가치보다 정부가 쌓아 놓은 빚이 19.3% 더 많다는 뜻이다. 당장 나라가 파산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빚이 늘수록 이자 부담도 커진다. 그만큼 교육과 복지에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정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연금'이다. 로이터가 지난 8일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2027년 프랑스의 연금 관련 지출은 약 4천360억 유로(약 654조)로 GDP의 14%에 이를 전망이다. 고령화로 연금을 받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이를 떠받칠 재정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문제에 손을 댔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2023년 법정 퇴직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단계적으로 높이는 개혁을 추진하자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더 오래 일해야 한다는 부담에 반발한 것이다. 정부로서는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위한 개혁이었지만, 국민에게는 노후의 부담을 떠넘기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연금 부담은 교실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로이터는 13일 프랑스 교육부 예산의 상당 부분이 퇴직 공무원 관련 부담금으로 잡혀 있다고 보도했다. 교육 예산이 늘었다고 해서 그 돈이 고스란히 교사 충원이나 학교 시설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정부는 2027년 재정적자를 GDP의 5%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AFP에 따르면 이를 위해 약 430억 유로(약 64조 5천억 원) 규모의 지출 절감과 재정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은 긴축의 칼날이 교육과 복지 등 공공서비스를 향할 수 있다며 반발한다.
정치의 양극화 심화, 극우는 집권 기회 엿본다
교육과 경제를 둘러싼 불만은 정치권까지 뒤흔들고 있다. 2017년 중도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들어 정치적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연금개혁에 대한 반발에 생활비 부담과 재정 악화까지 겹치면서 민심이 등을 돌렸다. 2024년 조기 총선 이후에는 어느 정치 세력도 의회에서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국정 운영마저 꼬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대통령과 총리가 행정권을 나눠 갖는 이원집정부제 국가다. 대통령의 권한이 강하지만, 정부가 예산안과 주요 법안을 처리하려면 의회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권이 여러 진영으로 갈라지면서 합의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 앞에 놓인 가장 큰 숙제도 2027년 예산안 처리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야당 설득에 나섰지만, 사회당 등은 긴축 정책에 반발하고 있다. 돈을 아끼자니 국민이 반발하고, 돈을 쓰자니 나랏빚이 걱정인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정치권의 시선은 이제 2027년 대통령 선거로 향하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직을 연속 세 차례 맡을 수 없는 마크롱은 이번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정부의 위기가 길어지면서 민심도 기존 정치권에서 멀어지는 모습이다. 2027년 대선을 앞둔 여론조사에서는 극우와 급진좌파 후보의 지지세가 두드러진다. 로이터에 따르면 12일 발표된 톨루나 해리스 인터랙티브의 여론조사에서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은 대선 1차 투표 지지율 35~37%를 기록했다.
극좌 성향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역시 조사 대상인 5개 가상 대결 구도 모두에서 결선 진출권에 해당하는 2위에 올랐다. 중도 진영이 고전하는 가운데 프랑스 정치의 무게중심이 양극단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그 중심에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있다. 이들의 시선은 프랑스 권력의 심장부, 대통령 관저이자 집무실인 엘리제궁을 향하고 있다.
마린 르펜과 조르당 바르델라가 이끄는 국민연합은 강력한 이민 규제와 치안 강화, 프랑스 국민 우선 정책을 앞세워 지지층을 넓히고 있다. 기존 정치권이 경제난과 사회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 강경한 정책을 대안으로 내세우며 권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연합은 공공지출을 줄여 2030년까지 재정적자를 GDP의 3% 아래로 낮추겠다는 구상도 내놓았다.
좌파 진영에서도 2027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층 결집에 나서고 있다. 극좌 성향의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를 이끄는 장뤼크 멜랑숑은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한 학생들의 교육 환경 개선 촉구 시위에 동참하며 청년층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마크롱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은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핵심 회원국이자 핵보유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에서 극우 세력이 집권한다면 그 파장은 유럽 통합과 이민 정책을 넘어 유럽 정치 지형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 낡은 교실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외침은 거리로 번져 정치권까지 뒤흔들고 있다. 그렇게 프랑스는 교육의 위기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둘러싼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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