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35명에 교사는 1명, 학생 1명에 진압 경찰은 5명", "최루가스에 당한 청년들, 갈라진 공화국"
지난 5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열린 고등학생들의 학교 봉쇄 시위에는 이런 손팻말이 등장했다. 교실에는 교사가 부족하고, 거리엔 진압경찰이 넘쳐난다는 고등학생들의 항의가 한 문장에 응축돼 있었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2일(현지시각) 프랑스 서부 브레스트의 케리셴 고등학교 인근에서 학교 봉쇄 시위를 벌이면서 최루가스가 자욱한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9월 말부터 과도한 수업시간과 과밀 학급, 교사 부족, 폭염에 취약한 교실 환경 등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파리와 수도권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했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일간 르몽드의 5일(현지시각) 보도를 보면, 이번 고등학생 시위는 파리 남동부 교외 크레테유의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시작됐다. 개학 뒤에도 프랑스어 교사 등이 부족해 일부 학생들은 몇 주 동안 수업조차 받지 못했다. 학생들은 교사와 인력 부족에 항의하며 학교 봉쇄에 나섰다.
이번 시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육환경에 대한 불만이 파리의 대표적 부촌인 16구와 같은 지역이 아니라, 생드니를 비롯한 노동계층 지역에서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특히 파리 북부 교외의 생드니는 노동계층과 이민자 배경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번 시위는 지역에 따른 교육 여건의 격차와 불평등 문제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한 고등학생 시위 참가자가 5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열린 고등학생 시위에서 “학생 35명에 교사는 1명, 학생 1명에 진압경찰은 5명”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왼쪽). 다른 참가자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최루가스에 당한 청년들, 갈라진 공화국(Gassed Youth, divided Republic)"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고등학생 시위 참가자들이 5일(현지시각)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전국적인 고등학생 학교 봉쇄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불과 열흘 만에 시위는 파리 교외를 넘어 전국으로 번졌고, 프랑스 전체 고등학교 약 3600곳 가운데 약 30%가 이번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다. 학생들이 문제 삼은 건 교사 부족과 과밀 학급, 낡은 학교 건물, 빡빡한 시간표와 프랑스의 대학입학 지원·배정 시스템인 파르쿠르쉬프(Parcoursup)가 만들어 내는 교육 불평등이었다.
르몽드는 이번 운동이 파리 교외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돼 SNS를 타고 불과 열흘 만에 전국으로 번졌으며, 규모와 성격 면에서 최근 수십 년 사이 가장 큰 청소년 운동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시위가 커지면서 곳곳에서 쓰레기통과 학교 시설에 불이 붙고 경찰과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 대응을 둘러싼 논란도 커지고 있다. 에두아르 제프레 교육장관은 시위 시작 이후 학생 19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같은 날 프랑스 내무부는 경찰과 헌병 등 치안 인력의 부상자가 650명이라고 전했다.
로이터는 지난 2일 시위와 관련해 약 5천 명이 체포됐으며 대부분이 10대라고 보도했다. 프랑스 정부는 기물 파손에 대한 청소년과 부모의 배상 책임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5일(현지시각) 파리 바스티유 광장 인근에서 고등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한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진압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특히 5일 북부 랑스에서는 15세 고교생이 경찰 개입 과정에서 사용된 수류탄 폭발로 손을 잃었다.
앞서 9월28일 파리 북서부 생투앙로몬에서는 14세 학생이 경찰의 최루탄 발사기에 얼굴을 맞아 턱이 두 군데 골절되고 치아가 크게 손상됐다. 9월30일 투르에서는 16세 학생이 경찰의 고무탄 발사기(LBD)에 맞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시위 여파로 지난 2일 프랑스 전역에서 고등학교 4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전체 고등학교 10곳 중 1곳이 넘는 규모다. 정부는 부모들에게 자녀가 시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촉구했다.
4일(현지시각) 파리 북부 생드니에서 학교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고등학생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위 참가 고등학생들이 '93 1312'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93'은 생드니의 행정구역 기호이고, '1312'는 'All Cops Are Bastards(모든 경찰은 나쁜 놈들이다)'라는 구호의 약자인 ‘ACAB’를 숫자로 나타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동네는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AFP/연합뉴스
5일(현지시각)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의 귀스타브 에펠 고등학교에서 학교 봉쇄 시위 도중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고등학생들이 '고등학생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그래피티 앞에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문제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 훨씬 전부터 경고음이 울렸다는 점이다. 프랑스 의회에서는 일찍부터 교사 결원과 대체교사 문제를 교육의 연속성을 위협하는 문제로 지적해왔다.
프랑스 상원이 2025년 6월11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2024학년도 교사 부재를 대체 인력이 메우지 못하면서 학생들이 받지 못한 수업시간은 초·중등 전체 평균 4.3%에 달했다. 중·고등학교를 포함하는 공립 중등교육에서는 이 비율이 7.4%로 더 높았다. 특히 15일 미만의 단기 부재는 약 90%가 대체되지 않았고, 이에 따른 미대체 수업시간만 1080만 시간에 달했다.
교사 부재 문제도 커졌다. 공립 중등교육에서 15일을 초과해 대체 인력이 필요했던 장기 부재 일수는 2023~2024학년도 기준 2018년보다 15.6% 증가했다. 고등학교만을 따로 집계한 수치는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전반에서 교사 공백과 이에 따른 수업 차질이 누적돼 왔음을 보여준다.
2024년에는 교사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 교육 여건 악화와 교사 부족에 항의하는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고, 2026년에는 결국 학생들이 직접 학교 문을 막고 거리로 나왔다.
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고등학생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진이 붙은 인형을 들고 교육 환경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번 시위는 대학생이 아닌 10대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교육 환경을 직접 문제 삼아 전국적인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프랑스에서 대학생이 주도하거나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한 대규모 학생 운동은 낯선 일이 아니다.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거리로 나선 '68혁명'과 1986년 대학개혁 반대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클로드 모네 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학교 봉쇄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시위 참가 학생들이 "우리를 엿 먹이려 한다면, 우리도 '68년 5월'로 맞서주겠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 문구는 1968년 5월 프랑스를 뒤흔든 학생·노동자 봉기를 소환한 것이다. ⓒAFP/연합뉴스
이번 시위에 나선 고등학생들도 이러한 저항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소환하고 있다. 파리의 클로드 모네 중등학교를 봉쇄한 학생들은 "우리를 엿 먹이려 한다면, 우리도 '68년 5월'로 맞서주겠다!"는 손팻말을 내걸었다. 당시의 대규모 봉기를 재현하겠다는 뜻을 담은 언어유희다.
교사가 없고, 교실은 붐비고, 학교는 낡았다. 오래 쌓인 교육 현장의 문제가 결국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밀어냈다. 다만 시위가 커지면서 일부 현장의 폭력과 기물 파손,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경찰의 강경 진압이 동시에 논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