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한 아버지가 극심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의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14세 딸을 밀가루 두 포대의 대가로 결혼시켰다는 증언이 나왔다.
2026년 9월25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피란민들이 자선 급식소가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모여 있다. ⓒAFP/연합뉴스
BBC가 23일(현지시각) 유엔인구기금(UNFPA)의 최근 보고서를 토대로 이같이 보도했다. 앞서 UNFPA가 17일 발표한 '다시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다: 칸유니스와 가자시티 피란민 캠프 여성들의 목소리(I WANT TO FEEL SAFE AGAIN : Women's Voices From Displacement Camps in Khan Younis and Gaza City)' 보고서에는 가자시티와 칸유니스의 피란민 캠프에 머무는 여성 230명의 증언이 담겼다. 조사는 2025년 12월부터 2026년 1월까지 16차례에 걸친 포커스그룹 토론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사에 참여한 한 여성은 2025년 기근 당시 "한 남성이 자신과 다른 자녀들이 먹을 수 있도록 14세 딸을 밀가루 두 포대의 대가로 결혼시켰다"고 전했다. 서로 다른 피란민 캠프에 머물던 여성 6명도 식량이나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대가로 소녀를 결혼시키는 비슷한 사례를 증언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학교가 문을 닫고 의료체계가 약화되는 데다 식량과 물마저 부족해지면서 조혼과 강제결혼, 성폭력, 생리 빈곤, 위험한 임신과 출산 등 또 다른 위기가 여성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조혼·강제결혼 신고, 올해 상반기 123% 증가
유엔인구기금(UNFPA)이 17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 신고된 조혼·강제결혼 사례는 지난 1월부터 6월 사이 123% 증가했다. UNFPA는 극심한 굶주림과 빈곤, 소득 상실, 학교 폐쇄 등으로 가족들이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을 주요 배경으로 지목했다.
2026년 9월21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가자시티의 파손된 건물에서 한 팔레스타인 피란민 소녀가 널어놓은 옷가지 옆에 서 있다. 이 소녀는 가족과 함께 이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전쟁 전 가자지구에서는 초등학교 이후 모든 교육 단계에서 여학생 수가 남학생보다 많았고 학업 성취도도 높았다. 그러나 장기간 이어진 학교 폐쇄로 많은 아이가 교육에서 이탈했다. 남자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으며, 여자아이들은 안전이 더욱 위협받고 있다.
특히 부모를 잃은 소녀들이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UNFPA 조사에 참여한 가자시티의 한 여성은 가족 중 각각 14세와 15세인 두 소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증언했다. 부모가 모두 숨진 뒤 이들을 책임지게 된 삼촌들이 부양 부담을 덜기 위해 어린 나이에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성폭력 신고도 61% 늘었다
2026년 9월25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알마와시 지역에 마련된 팔레스타인 피란민들의 텐트촌 전경이다. ⓒAFP/연합뉴스
성폭력 위험도 커지고 있다. UNFPA가 10일 발표한 '가자지구 젠더 기반 폭력 동향 분석: 2026년 4~6월(GBV Trends Analysis April-June 2026)'에 따르면 강간과 성폭행을 포함한 성폭력은 이 기간 신고된 전체 젠더 기반 폭력 사건의 2.7%를 차지했다. 올해 1분기 2.1%보다 0.6%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절대적인 신고 건수로는 직전 분기보다 61% 증가했다.
다만 실제 성폭력 피해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낙인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유엔의 안전 실태 조사에서는 여성과 소녀들이 특히 밤에 위험에 노출되면서 피란민 캠프의 화장실과 세면시설 이용을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6년 8월25일(현지시각) 이스라엘 쪽에서 바라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파괴된 건물들. ⓒ로이터/연합뉴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과 결혼하도록 압박받는다는 증언도 나왔다. UNFPA가 1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학교를 개조한 피란시설에 머무는 한 여성은 강간 피해 사실이 알려진 뒤 피해 여성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과 결혼하는 일이 있다고 증언했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데 따른 수치심과 사회적 낙인을 피하려는 이유에서다.
남편을 잃었거나 남편이 구금 또는 실종된 여성들은 성적 학대와 착취에 더욱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가자지구 전체 가구의 약 4분의 1은 여성이 가족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전쟁 전의 두 배 수준이다.
한 달에 생리대 1천만 장 필요한데, 4분의 1도 없었다
2026년 9월19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새 학년이 시작된 가운데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파괴된 건물 잔해 사이를 지나 학교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전쟁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월경마저 생존의 문제로 만들었다. UNFPA가 2025년 6월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가자지구에는 월경을 하는 여성과 소녀가 약 70만 명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생리대는 한 달에 1천만 장이 넘지만, 당시 공급 가능한 물량은 필요량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생리대를 구하지 못한 여성과 소녀들은 낡은 옷이나 천, 스펀지 등을 대신 사용해야 했다. 깨끗한 물과 비누, 화장실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제대로 씻어 다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이 같은 문제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UNFPA가 2026년 8월20일 발표한 '월경위생관리 워크숍 보고서(Menstrual Hygiene Management Workshop Report)'에서도 가자지구의 심각한 생리용품 부족과 열악한 식수·위생시설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격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국제 의료구호단체 메드생뒤몽드(Médecins du Monde·MdM)가 2025년 10월8일 발표한 현장조사에 따르면 품질이 낮은 생리대조차 한 팩에 최소 15달러(약 2만 원)에 달했다.
2024년 5월부터 2025년 8월까지 MdM의 가자지구 의료시설에서 이뤄진 성·생식건강 관련 진료 2만2천747건 가운데 36%는 생식기 감염 관련 진료였다. MdM은 물과 위생시설 부족, 생리용품의 높은 가격 등이 이러한 감염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출생아 1천 명당 유산 208.5건
2026년 9월7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나세르 의료단지 내 과밀한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에서 미숙아들이 누워 있다. ⓒAFP/연합뉴스
임신부들도 심각한 위험에 놓여 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이 지난 7월23일 발표한 인도주의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가자 보건부의 생식건강 정보 플랫폼인 'Bayan Dashboard'에는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3천950건이 넘는 유산이 기록됐다.
출생아 1천 명당 기록된 유산은 208.5건으로, 2025년 하반기의 3.3배에 달했다. 지난 4월에는 출생아 1천 명당 377.3건까지 치솟았다. 전체 유산의 약 74%는 임신 초기 3개월에 발생했으며, 임신부의 57.1%는 빈혈 상태였다.
OCHA는 위기와 반복되는 피란, 식량 불안, 필수 의료서비스 약화가 누적되면서 가자지구 여성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먹을 것이 사라지면 딸의 미래가 거래되고, 학교가 사라지면 소녀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물과 생리용품이 사라지면 일상의 존엄이 무너지고, 의료서비스가 약화되면 임신과 출산마저 생명을 건 일이 된다. 이처럼 가자지구의 여성과 소녀들은 지금 또 다른 전쟁을 견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