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1895~1971)의 생애를 다룬 어린이용 역사 학습만화가 출간됐다.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였던 유일한 박사의 삶을 통해 나눔과 사회적 책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어린이들에게 제공한다.
유일한 박사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장하는 과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조국에 헌신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담겼다.
'who 근현대사 유일한' 본문 ⓒ 유한양행
20일 유한양행에 따르면, 이번 역사 학습 만화의 제목은 ‘who? 근현대사 유일한’이다. 다산북스에서 출간했다.
‘who? 근현대사 유일한’은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를 만화로 생생하고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유 박사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동해 사업가로 성장하고 1926년 유한양행을 세우는 이야기에서부터,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특수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에 참여했던 독립운동의 역사까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자세하게 담았다.
이번 학습만화는 어린이 독자들이 유일한 박사의 삶을 통해 역사적 지식을 쌓는 데서 더 나아가, 독해 역량까지 기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책에 수록된 ‘근현대사 독해 워크북’에는 유일한을 주제로 한 강연록, 한인자유대회 공고문, 유일한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 냅코 프로젝트를 소재로 한 뮤지컬 광고문, 딸에게 보내는 편지, 윌로우하우스를 방문한 체험 학습 보고서 등이 다채롭게 담겼다.
‘who? 근현대사 유일한’은 전국 초등학교 및 공공도서관에 차례로 배포된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민 보건을 위해 평생을 바친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따뜻한 애민 정신이 이번 학습만화를 통해 많은 어린이 독자들의 가슴 속에 닿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who 근현대사 유일한' 표지 ⓒ 유한양행
◆ 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혁신적인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평가된다.
유 박사는 1936년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다. 유 박사는 당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 52%를 사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그는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 박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극히 일부만을 후손에게 물려줬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유 박사의 원칙이었다. 묘소 주변 땅을 딸에게, 학자금 1만 달러를 손녀에게 물려준 것이 전부였다.
가족의 경영권 세습도 금지했다. 본인이 은퇴하기 전 회사에서 일하던 모든 친인척을 퇴사시키고 전문경영인 제도를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후 유한양행은 1969년 조권순 대표부터 지금의 조욱제 대표이사 사장까지 총 11명의 대표를 내부 인사를 통해 선임했다. 평사원에서 시작해 대표까지 오른 인사가 경영을 맡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유 박사는 1970년 개인주식 8만3천여 주를 기탁해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 기금’을 발족하고, 이듬해 전 재산을 이 기금에 출연했다. 이 기금은 1977년 ‘재단법인 유한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소유주식 일부를 유한학원에 배정했다. 유한학원은 1964년 개교한 유한공업고등학교, 1977년 문을 연 유한대학교를 운영한다.
유 박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집행부에 가담했고, 이후에도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애국운동을 전개했다. 1942년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재미 한인들이 참여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1945년에는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스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태평양문제연구소(IPR)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또한 유 박사는 1942년부터 미국 전략사무국(OSS)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OSS의 비밀 침투작전인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자 공작원으로 입대했다. 이 작전은 한국에 최정예 특수요원들을 투입해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해 일본을 무력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유 박사는 당시 선발된 요원 19명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사실은 유 박사 사후에야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