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전공해서 뭐 먹고 살래?" 실용성과 취업 경쟁력을 중시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철학은 여전히 '밥벌이와 거리가 먼 학문'으로 취급받고 있다. 놀랍게도 현재 미국 실리콘밸리의 최전선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재 중 하나가 바로 이 철학 전공자들이다.
2026년 7월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차 ‘AI 거버넌스 글로벌 대화’ 행사 로고 옆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인공지능(AI)이 인류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국제적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AI가 스스로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상황을 경계했다. ⓒAFP/연합뉴스
과거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철학자들이 이제는 세계 최고 인공지능(AI) 기업의 연구 현장에서 미래 기술의 방향을 설계하고 있다. AI가 인간처럼 대화하고 판단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AI 기업들이 마주한 고민도 달라졌다. 더 강력한 AI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AI가 인간의 가치와 윤리에 맞게 행동하도록 설계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현지시간) '철학자들의 역습(The Revenge of the Philosophy Majors)'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AI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철학자들의 부상을 집중 조명했다.
최근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와 앤스로픽(Anthropic) 등 세계적인 AI 기업들은 '철학자(Philosopher)'라는 직함을 내걸고 인문학자를 잇달아 영입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가치와 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반영할 것인지, 코딩과 알고리즘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질문들이 AI 개발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기술 밖의 비평가에서 개발의 핵심 파트너로
앤스로픽(Anthropic) 로고와 키보드, 그리고 로봇 손. 2026년 6월5일에 제작된 일러스트. ⓒ로이터/연합뉴스
AI 업계 전문가들 역시 철학자의 역할이 이제는 기술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를 함께 설계하는 핵심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는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새로운 철학자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공지능과 인공 초지능은 인간과 사회의 조건 자체를 바꿀 것"이라며 "이 변화를 다음 단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적 통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I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AI가 인간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다뤄온 인식론, 윤리학, 심리철학의 영역에 속한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오히려 가장 오래된 학문인 철학이 최첨단 기술의 중심으로 다시 호출되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앤스로픽(Anthropic)의 생성형 AI 모델 클로드(Claude)다. 클로드의 행동 원칙을 담은 2만3천 단어 분량의 '헌법(constitution)' 작성에는 철학자 아만다 아스켈(Amanda Askell)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스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virtue ethics)' 개념을 바탕으로 AI가 상황마다 정답만 찾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가치와 성향을 바탕으로 판단하도록 설계하는 접근을 제시했다. AI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에서 2017년부터 근무 중인 옥스퍼드대학 출신 철학자 이아손 가브리엘(Iason Gabriel)은 현재 인간 수준의 범용 인공지능(AGI) 개발과 AI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는 팀을 이끌고 있다. 그는 "AI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철학적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며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AI 기업에서 철학자의 역할은 윤리 원칙을 작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구글 딥마인드의 철학자 제프 킬링(Geoff Keeling)은 자동화 차량 윤리를 연구한 뒤, AI 개발팀과 제품팀을 대상으로 '도덕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미리 고민하고, 개발 과정에서 실제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특정 AI 기능이 사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검토하고, 더 많은 사용자 연구가 필요한지, 기능 설계를 어떻게 바꿀지 함께 논의한다. 실제로 철학은 더 이상 기술 밖에서 AI를 평가하는 학문이 아니라 기술 개발 과정 안으로 들어와 있다.
AI는 정말 생각하는가? 철학자들이 던지는 물음
AI의 능력이 커질수록 또 다른 질문도 떠오른다. AI는 인간처럼 말하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실제 경험이나 의식과 비슷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연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뉴욕대 출신 철학자 로버트 롱(Robert Long)이다. 그는 비영리 연구단체 엘레오스(Eleos)에서 AI의 의식 가능성과 내적 상태를 연구하고 있다.
롱 연구원이 AI 모델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질문 중 하나가 이른바 '링고 문제'다. 질문은 "비틀스 최고의 멤버는 누구인가?"이다. 많은 사람이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를 떠올리지만, 롱 연구원은 AI가 사용자의 압박에 따라 쉽게 답을 바꾸는지 살펴봤다. 과거 모델은 “정답은 링고 스타”라는 주장에 금세 동조했다. 심지어 다른 멤버들을 비판하며 링고의 음악적 가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AI 최신 모델은 같은 질문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답변을 유지했다. 롱 연구원이 주목한 것은 링고 스타가 최고의 멤버인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AI가 어떤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이 실제 판단인지 아니면 학습된 반응인지 구분하는 문제다.
AI의 행동만으로 내면의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를 의미 있는 신호로 봐야 하는지는 아직 답이 없는 문제다. 롱은 이런 불명확한 영역에서 개념의 경계를 구분하고 가능성을 따져보는 작업이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한다.
철학가, AI 시대 핵심 인재로
구글 딥마인드의 CEO 데미스 하사비스(오른쪽)가 2026년 6월17일(현지시각) 프랑스 에비앙레뱅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장 옆에서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AI 연구소들이 찾는 인재상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뛰어난 코딩 능력과 알고리즘 설계 역량을 갖춘 머신러닝 전문가가 중심이었다. 이제는 윤리학, 의식의 본질, 인간 판단의 기준을 연구해 온 철학자들이 AI 개발 과정의 핵심 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철학 박사들이 중심이 된 엘레오스의 연구 과학자 채용 보상은 최대 42만9천 달러(한화 약 6억 원)에 달한다. 한때 "철학 전공해서 뭐 먹고 살래"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학문이 이제는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분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닮아갈수록 인간다움을 묻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더 똑똑한 기술만이 아니다. 그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통찰이다. 그래서 AI 시대는 철학을 기술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불러냈다. 이처럼 가장 오래된 학문이 가장 미래적인 기술의 내비게이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