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처음부터 폭력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는 ‘밈’과 ‘장난’으로 소비되고, 교실에서는 농담처럼 오간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의 반복이 결국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며 웃고 있다. AI 합성 이미지.
지난 6월29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불거진 배재고 야구부의 ‘스타벅스 가야지’ 응원 구호 논란도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청소년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지역의 상처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비틀어 피해자를 조롱하는 혐오 표현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이들의 장난을 과도하게 문제 삼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선 강한 정치적 신념보다 또래 집단 소속감, 우위 경쟁을 위해 혐오 표현이 '놀이 문화'처럼 확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러 연구는 온라인에서 놀이처럼 소비되는 혐오 표현이 현실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내놓고 있다.
교사 10명 중 8명, "교실 내 혐오표현 문제 심각하다"
3일 서울 용산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학생학부모교사인권보호연대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배재고 학생들에 대한 근조화환 테러 중단 등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사례는 특정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혐오 표현과 극단적 담론이 교실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역사 수업 시간, 교사가 항일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친일파 이완용 암살 시도를 설명하자, 학생들의 시선은 역사 속 인물인 이완용이 아닌 현직 대통령 이재명에게 먼저 꽂히며 웃었다. 또 '~노' 같은 표현은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말로 별다른 거리낌 없이 교실 안을 오간다.
교사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치인의 이름과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이 쏟아지고, 역사 수업은 어느새 정치적 프레임과 혐오 표현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한다. 이는 고등학교 현직 역사교사 박모(48) 씨가 전한 교실의 풍경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전국 초·중·고 교사 177명을 대상으로 2025년 12월 24일부터 2026년 1월 6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9.8%가 학교와 교실 내 극우화된 혐오 표현 문제가 심각하다고 답했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는 응답도 80.2%에 달했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표현은 전·현직 대통령 비하(50.4%),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일베) 용어를 비롯한 젠더·여성 혐오(20%), 소수자 비하와 역사 왜곡(15%) 등이었다.
박 교사는 "여자 윤리 선생님이 교과 과정인 '성과 사랑'을 가르쳐도, 학생들이 '선생님 꼴페미에요?'라는 소리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이어 "올해 고1 학생인데 일주일에 5일씩은 올공(잠실 올림픽경기장 투표소 봉쇄 시위) 시위에 간다. 그 반 선생님이 제게 건네준 학생의 포스트잇에는 '윤어게인(윤석열 전 대통령 복귀 운동), 북괴, 멸공(공산주의를 멸한다)'가 적혀 있었다"고 전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혐오 표현도 함께 퍼진다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개표소 앞에서 국조특위 현장조사를 앞두고 시위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전 세계적으로도 청소년 극우화, 급진화가 심화하면서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떠올랐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더 이상 일부 청소년의 일탈이나 온라인 문화의 부작용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의 존립에 직접적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외로움과 학업 스트레스,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는 청소년일수록 온라인 극단주의 커뮤니티가 제공하는 소속감과 우월감에 더 쉽게 끌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심리적 취약성이 극단주의 콘텐츠와 결합할 경우 현실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우려되는 형태가 이른바 '외로운 늑대'로 불리는 자생적 테러리스트다. 조직의 직접적인 지시 없이 온라인 혐오 콘텐츠의 영향을 받은 개인이 현실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유형이다.
이 같은 흐름은 실제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호주 경제평화연구소(IEP)가 올해 3월 공개한 '2026 글로벌 테러리즘 지수(GTI)'는 청소년 급진화를 서방 국가들이 직면한 핵심 안보 위협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유럽과 북미에서 진행된 테러 관련 수사 가운데 아동·청소년이 차지한 비율은 42%로 2021년보다 세 배 증가했다. 급진화 속도 역시 과거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리던 것과 달리 이제는 몇 주 만에 이뤄지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보고서는 짧은 영상 중심의 콘텐츠와 알고리즘 추천 구조(이는 유투브의 장삿속에 낳은 결과다), 청소년기의 심리적 취약성이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급진화된 미성년자 상당수가 가족으로부터 방임이나 심리적 학대,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극단주의와 혐오 표현도 함께 확산되는 현상이 여러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일 연방헌법수호청(BfV)과 연방내무부가 올해 6월30일 발표한 '2025 헌법수호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내 잠재적 극우 성향 인구는 전년보다 8450명 늘어난 5만8500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폭력 지향 극우 세력만 1만5600명에 달했다.
독일 보고서는 2025년 극단주의 관련 범죄가 총 5만8851건 발생했으며, 이 가운데 폭력 범죄는 3294건으로 전년보다 약 10% 증가했다고 밝혔다. 우익 극단주의는 여전히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핵심 위협으로 지목됐고, 좌익 극단주의 영역에서도 폭력 범죄가 확인되는 등 정치적 양극화 전반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청소년 급진화,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한 이유
1일 서울 강동구 배재고 앞에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독일에서도 청소년의 정치적 급진화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회 문제로 보고 있다. 독일 학교에서는 정치·시민교육 수업에서 사회적 쟁점을 놓고 찬반 토론을 진행하되, 교사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주입하지 않고 논쟁적인 사안을 균형 있게 다루도록 하는 교육 원칙으로 적용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접한 정치적 주장과 허위정보를 교실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돕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민주시민교육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교실에서 정치 관련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교사의 수업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냥 장난이었다'는 말로 덮인 작은 혐오 표현이 반복될수록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무뎌지고, 사회의 공감 능력과 폭력에 대한 경계심 역시 함께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혐오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문제로 인식하도록 돕고, 서로 다른 의견을 토론과 비판적 사고로 풀어낼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이야말로 급진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