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반대편에서 서로에게 창끝을 겨눴던 한미약품 오너 가족이 다시 뭉치는 신호가 포착됐다. 오너 2세 차남이 어머니와 누나의 우호세력에게 지분을 넘기면서다.
이에 따라 오너일가 분쟁 과정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키웠던 개인 최대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입지가 좁아지게 됐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 결과에 따라 4자연합 내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왼쪽부터)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사장,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 그래픽 허프포스트코리아
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미약품그룹 오너 2세인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사장(한미정밀화학 대표이사)은 자신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주식 348만3808주(5.09%) 중 170만9788주(2.50%)를 ‘나우아이비22호펀드’에 821억 원에 매각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매각은 장외매도 방식으로 이뤄지며, 거래는 8월5일부터 9월3일까지 진행된다.
이에 따라 임 사장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은 기존 5.09%에서 2.59%로 줄어들 예정이다.
임 사장은 이 같은 내용을 공시한 후 이례적으로 입장문까지 발표했다. 그는 입장문에서 “아버님(임성기 선대회장)의 경영철학과 뜻을 가장 진정성 있게 계속 이어가기 위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이를 계기로 불필요한 논란이 사라지고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경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어머니(송영숙 회장), 누님(임주현 부회장)과 함께 ‘제약보국’이라는 아버님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회사의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할 것”이라며 “제 결정이 한미를 한미답게 키워가고 그룹 거버넌스 안정화에도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현재 한미약품그룹 4자연합 내 송영숙·임주현·라데팡스파트너스와 신동국 회장 간 3대 1 균열 움직임이 포착되는 상황에서, 이번 임 사장의 지분 매각이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 전선을 재설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경영권 분쟁이 종결된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는 입장문에서 드러났듯이, 경영권 분쟁 상황에서 적이었던 임 사장이 확실히 송영숙·임주현 모녀 쪽으로 입장을 틀었기 때문이다.
임 사장이 태도를 전환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임 사장의 지분을 매수하기로 한 곳이 벤처캐피탈인 나우아이비라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이 회사를 모녀 쪽 세력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우아이비의 최대주주(35.46%)는 정지완 솔브레인 회장인데, 솔브레인은 2024년 경영권 분쟁 발생 전 모녀가 상속세와 지배구조 개편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투자 또는 통합 파트너 대상으로 검토한 회사 중 하나다. 당시 양해각서(MOU) 초안까지 작성했지만 결국 무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우아이비의 2대주주(26.21%)인 킹스데일 역시 지배구조 정점에 정지완 회장이 있다.
특히 나우아이비는 현재 3만1천원 대에 형성돼 있는 한미사이언스 주가보다 50% 이상 높은 주당 4만8천 원에 임 사장의 지분을 매수하기로 했다. 이는 나우아이비의 주식 매수가 단순한 투자가 아니라 백기사 역할을 위한 것이라는 근거가 된다.
그러면서 오너 일가는 그간 경영권 분쟁을 다시 촉발할 수 있는 근원지로 여겨졌던 신동국 회장에 견줘 지분율에서 확실히 앞서며 승기를 잡게 됐다.
임 사장의 지분 거래가 완료되면 오너 일가는 총 30.98%의 지분율을 갖게 된다. 송영숙 회장(3.38%), 임주현 부회장(8.30%), 임종훈 사장(2.59%), 기타 친인척 등의 지분율을 합친 숫자다. 여기에 4자연합 일원인 라데팡스의 특수목적법인(SPC)인 킬링턴유한회사 지분율 9.81%를 합하면 모녀 쪽 우호지분은 40.79%가 된다. 이는 신동국 회장(22.88%)과 한양정밀(6.95%)이 보유한 29.83%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다.
앞서 신 회장은 임성기 선대회장의 장남이자 임종훈 사장의 형인 임종윤 전 한미사이언스 사장 지분을 확보한 바 있다. 임 전 사장은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쳐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코리포항 등 5인의 한미사이언스 주식 총 5.65%를 신 회장에 넘겼다. 이를 통해 신 회장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지분율을 30% 가까운 수준으로 늘렸다.
◆ 10월 4자연합 내 위약벌 소송 선고가 분수령 될 듯
2024년 시작된 한미약품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서 모녀 쪽의 승리를 이끌었던 4자연합 계약은 2029년 만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4자연합은 중요한 의사결정 시 사전 합의한 후 같은 목소리를 내는 내용의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을 맺었고,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외부 제3자에게 임의로 매각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내용의 우선매수권 및 동반매각참여권 조항을 계약에 포함시켰다. 아울러 4자연합 멤버 중 누군가가 사전합의 없이 독자 노선을 걷거나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을 깨고 반대표를 던지는 등 계약을 위반할 경우 벌금을 내도록 하는 내용의 위약벌 조항도 넣었다.
그런데 2025년 의사결정 합의 위반으로 실제 위약벌 소송이 제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미사이언스 차원에서 추진하던 신사업인 시니어케어 사업이 신 회장의 갑작스런 반대로 이사회에서 무산되자 모녀와 라데팡스 쪽에서 이를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 위반으로 보고 600억 원 규모의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의 선고는 10월1일 예정돼 있다.
아울러 모녀와 라데팡스 쪽은 한양정밀이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기반으로 교환사채(EB)를 발행한 것도 문제삼고 있다. 한양정밀은 2025년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한미사이언스 등 보유 주식을 대상으로 하는 EB를 발행해 총 885억 원가량을 조달했다.
일단 신 회장 쪽은 이번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4자연합은 유지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만약 신 회장이 패소하는 경우 이번 임 사장의 지분 매각으로 벌어진 지분율 차이와 위약벌 부담이 겹쳐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경우 신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매각한 후 이탈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만약 이렇게 되면 신 회장은 우선매수권 조항에 따라 지분을 4자연합 구성원 쪽에 매각해야 한다.
하지만 오너 일가와 라데팡스가 신 회장의 지분(29.83%)을 통째로 받아줄 만한 거액의 자금을 한 번에 마련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경우 신 회장은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위치에 놓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4자연합의 ‘기묘한 동거’를 유지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