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스트라이크존은 경기의 기본적 전제다. 배터리(투수와 포수)는 존을 기준으로 볼 배합을 짜고, 타자는 존을 기준으로 배트를 낼지 말지를 결정한다. 존이 넓은지 좁은지는 그 다음 문제다. 존이 어디에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는 믿음, 경기는 그 위에서 굴러간다.
어느 날 KBO가 “존이 너무 넓어서 투수들이 대충 던져도 스트라이크가 나오니, 스트라이크존을 바꾸겠다”고 선언해놓고, 새 존을 공개하지 않은 채 시간을 차일피일 끈다고 상상해보자. 새 존이 발표되지 않았다고 해서 경기가 멈추는 일은 없다. 시즌은 예정대로 치러진다.
KBO에 ‘저격’당한 배터리는 눈치를 보면서 어제의 존과 내일의 존 사이 어딘가로 공을 던져야 한다. 타자는 오늘의 스트라이크가 언제 볼로 바뀔지 모르는 채로 배트를 내야 한다. 규칙이 바뀌어서 생기는 혼란이 아니다. 너희가 잘못했으니 규칙을 바꾸겠다는 예고만 있고 실제로 규칙은 없어서 생기는 혼란이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6월22일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3일 KB금융지주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가 열린다. 차기 회장 후보군 12명(롱리스트)을 6명의 숏리스트로 추리는 자리다. 오는 11월 임기 만료를 앞둔 양종희 회장의 연임 도전이 걸린 절차이자, 금융당국이 금융지주들의 지배구조를 문제 삼으면서 내놓겠다고 한 개선안의 '1호 적용 무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개선안에 대해 "정부 라인에서 전체적으로 검토된 최종안이 보고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KB금융이 숏리스트를 확정하는 7월3일 전에는 발표될 것"이라고 시점까지 못 박았다.
그리고 7월3일이 왔다. 개선안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발표 시한은 반년 동안 수차례 밀렸고, 그때마다 연기 사유는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 금감원장이 공개 석상에서 못 박은 날짜를 금융위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가 부인하는 장면까지 연출됐다. 이사회와 경영진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주문해온 금융당국이, 정작 기관 사이의 엇박자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사이에도 경기는 계속됐다.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 빈대인 BNK금융지주 회장의 선임이 확정됐다. 지배구조 개선안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주총 시즌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경기는 KB, 그리고 연말 은행장 인선이다. KB 회추위는 새 룰 없이 기존 절차대로 후보를 추리고 있다. 숏리스트 3명 압축, 최종 후보 확정으로 이어지는 일정도 이미 잡혀 있다. 연말에는 5대 시중 은행장 임기가 일제히 만료된다. 이 원장은 개선안을 은행장 선임 절차에도 적용하겠다고 예고해 둔 터다.
금융권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해진 절차대로 인사를 준비하면서도, 새 기준이 나오면 언제든 고칠 수 있게 대비해두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제의 존과 내일의 존 사이로 공을 던지는 배터리와 같은 처지다.
지금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것은 규제의 '내용'이 아니라 규제의 '부재'다. 강한 규제는 반발을 부르고, 느슨한 규제는 실효성 논란을 부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공개된 규제라면 시장은 계산하고 적응한다. 계산이 불가능한 것은 단 하나, 있다고 예고됐지만 아직 없는 규제다.
스트라이크존의 권위는 존이 넓은지 좁은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존이 공개돼 있고, 예고한 대로 적용된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개선안에는 회장 임기 최대 6년 제한, 연임 시 주주총회 특별결의 도입 등 강도 높은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이 과한지 아닌지는 그 다음에 따질 문제다. 아무리 강한 규범도 그것을 말하는 이의 말이 가벼우면 규율이 서지 않는다.
심사대에 오르는 것은 KB금융지주의 회장 후보들만이 아니다. 양종희 회장의 연임 여부보다 먼저 심사대에 오른 것은 당국의 신뢰다.
새 스트라이크존은 존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심판'들의 수장이 공개를 약속했던 바로 그날인 오늘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