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고등학교의 "스타벅스 가야지" 응원 구호로 전 사회적으로 걱정이 깊어진 상황에서, 고교 스포츠 현장에서 혐오와 차별에 대처했던 다른 나라 사례가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일본 내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 재학생들이 2024년 8월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일본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 결승전인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 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차지하자 '동해바다 건너서'로 시작하는 교가를 함께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6월29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 고교야구의 일그러진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배재고 더그아웃에서 터져 나온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응원가는 지역 차별과 5·18 민주화운동을 희화화하는 온라인 혐오 정서가 경기장 안으로 스며든 장면이었다.
배재고는 이날 광주일고를 7-2로 꺾고 승리를 거뒀지만, 결과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질문을 남겼다. 승리의 기쁨보다 더 크게 남은 것은 한국 고교야구가 무엇을 교육하고 있는가에 대한 불편한 현실이다.
고교 스포츠가 프로 선수를 찍어내는 공장이 아니라,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장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고교 교육의 근본적 실패를 보여준다고는 평가도 나온다.
야구 강국인 미국과 일본의 고교야구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없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세계 야구를 대표하는 양대 강국으로 꼽힌다. 미국은 메이저리그(MLB)를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선수층을 갖춘 야구 강국이며, 일본은 프로야구(NPB)와 고교야구 '고시엔' 문화를 통해 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경기 전 구호에서 터진 인종차별, 대회 2경기 기권으로 이어지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센트럴 가톨릭 고등학교 공식 홈페이지 화면. ⓒ센트럴 가톨릭 고등학교 공식 홈페이지
지난 4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센트럴 가톨릭 고등학교 야구부의 대응은 이번 배재고 사태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포틀랜드 지역 매체인 KGW 등에 따르면, 4월9일과 10일 경기 전 선수들끼리 모여 작전 회의와 구호를 하던 중 한 선수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학교는 이를 "우리 공동체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로 규정하며, 4월16일과 17일에 예정된 2경기를 연달아 자진 기권했다.
이후 학교는 2일간 대면 수업을 취소하고 온라인 자율 학습을 실시했으며, 야구팀 전원은 전교생에게 직접 사과했다.
미국 고교 스포츠를 관통하는 원칙은 이른바 '무관용의 원칙'이다. 승패보다 차별 없는 공동체 유지라는 가치가 우선이라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학교의 대응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재학생 약 100명은 4월 24일(현지시각) 수업 거부 시위를 벌이며 가해 선수의 퇴출과 코칭 스태프 정직을 요구했다.
한 학부모는 KGW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이라는 공에 맞았을 때 우리가 그 공을 되받아칠 때, 즉 기관의 책임을 물을 때 십자가나 교회 뒤에 숨을 수는 없다"며 "당신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혐오가 경기장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과 사회적 환경에서 경기장으로 유입될 때 이를 어떻게 통제하고 대응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일본 고시엔 시스템에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 고시엔, 지자체는 혐오 확산에 제동을 걸었다
교토국제고 학생들이 2024년 8월23일 일본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 결승전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의 결승전 경기가 열린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더위 속 응원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지점에서 논의의 중심에는 교토국제고가 있다. 재일조선인들이 설립한 민족학교(교토조선중)를 뿌리로 둔 이 학교는 고시엔이라는 공적 무대 위에서 그 역사성과 정체성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한국어 교가는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적 관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식민지 경험 이후의 기억이 겹겹이 응축된 상징이며,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시엔은 전국 생중계와 NHK 중계를 통해 일본 사회 전체에 공유되는 대표적인 국민 스포츠 이벤트로, 사실상 국가 행사에 준한다. 그런 무대에서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진다는 것은 일본 사회의 가장 공적인 영역에서 한국어가 공식적으로 청각화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역사성과 상징성이 겹쳐진 장면은 2024년 여름,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 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재일한국계 학교의 정상 등극이라는 서사와 함께 온라인 공간에서는 민족 차별적 혐오 표현,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1915년 시작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시엔은 일본에서 '청춘의 성지'이자 '여름의 낭만'으로 불리는 최고 권위의 고교야구 대회지만, 교토국제고의 우승 과정은 그 상징적 무대 위에 균열을 드러냈다. 일부 일본 네티즌들은 "이런 학교에 참가 자격을 주면 안 된다", "불쾌한 교가라 TV를 꺼버렸다", "한글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는 등의 혐오성 댓글을 쏟아냈다.
이에 교토부 지사는 결승전 단계부터 인터넷 실시간 모니터링을 지시했고, 우승 직후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러한 혐오 표현을 명확히 규탄하며 사법기관과 온라인 플랫폼에 삭제 및 대응을 요구했다.
지역 변호사회 역시 "청소년 선수에 대한 차별은 아동 권리 침해"라며 성명을 통해 대응에 힘을 보탰다. 교토부는 앞서 2021년 교토국제고 4강 진출 당시에도 차별 게시물 13건에 대해 삭제 요청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대회 주최 측인 공익재단법인 일본고등학교야구연맹은 별다른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결승 이후에도 추가적인 메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인권단체에서는 이를 두고 '혐오에 대한 침묵은 또 다른 방관'이라는 비판이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 학생야구헌장 제2조는 학생야구의 목적을 "평화롭고 민주적인 인류사회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자질을 갖춘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폭력을 배제하고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원칙 아래 일본 고교야구는 '품격'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내부 폭언이나 비하 발언이 발생하면 우승 후보라도 대회 도중 기권하는 연대 책임이 적용되며, 외부에서 발생한 혐오 역시 지자체와 교육 당국이 적극 개입해 학생 보호에 나선다.
결국 미국처럼 혐오 발생 시 팀 전체가 기권까지 감수하는 자정 구조, 일본처럼 지자체와 교육 시스템이 결합해 학생을 보호하고 혐오를 즉각 대응하는 체계는 한국 고교야구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다시 말해 승리를 위한 경기 이전에, 무엇이 교육이고 무엇이 공동체의 가치인가를 묻는다.
혐오 발언 없는 고교 야구 경기장. AI 이미지.
배재고가 두 차례 사과했지만 사과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보기 어려운 만큼, 광주일고 학생 선수에 대한 보호 조치와 가해 학생들에 대한 실효성 있는 교육·재발 방지 대책이 함께 뒤따라야 한다. 승리라는 결과에 눈이 멀어 혐오를 방치하는 경기장은 미래의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결국 또 다른 가해자가 만들어지는 곳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