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갸루', 중국의 '왕홍'. 한때 각국에서 소비되던 하위문화가 최근 한국의 젊은 세대와 연예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유행 코드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화장법을 따라 하는 수준을 넘어, 해당 MZ세대 감성을 건드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2030 사이 유행하는 '갸루'와 '왕홍'. AI로 제작한 이미지.
갸루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유행했던 청소년 하위문화로, 태닝한 피부와 화려한 메이크업, 개성 강한 패션이 특징이다. 한동안 과거의 유행으로만 여겨졌던 갸루가 최근 한국 SNS에서 다시 주목받는 데에는 걸그룹 리센느 멤버 미나미의 영향이 크다.
일본 출신인 미나미는 최근 유튜브 콘텐트를 통해 선보인 '갸루 캐릭터'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특유의 말투와 태도, 과장된 리액션은 하나의 밈(Meme)으로 확산됐고, 그의 유행어인 '거제 야호'는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나미의 어머니가 과거 일본에서 실제 갸루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순혈 갸루'라는 서사까지 형성됐다. 갸루라는 스타일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캐릭터성과 진정성이 대중의 관심을 자극한 셈이다.
중국의 왕홍 메이크업 역시 비슷한 흐름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 다만 왕홍 스타일은 갸루처럼 특정 시대의 유행이라기보다 중국 SNS 인플루언서들이 콘텐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시각적 연출 방식에 가깝다. 카메라와 조명 아래에서 가장 돋보이도록 설계된 왕홍 메이크업은 선명한 눈매와 뚜렷한 윤곽,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현실에서의 자연스러움보다 화면 속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같은 스타일은 이미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산됐다. 갸루 메이크업은 걸그룹 하츠투하츠를 비롯해 모델 한혜진, 배우 이민정과 이미숙 등이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왕홍 메이크업 역시 배우 한가인과 개그맨 곽범, 방송인 박명수 등이 직접 따라 하며 대중에게 노출됐다. 유명인의 참여가 유행 확산의 촉매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최근의 열풍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현상의 배경에는 현대 젊은 세대가 자아를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제시한 '페르소나(Persona)'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사용하는 가면, 즉 사회적 역할에 맞춘 외적 자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페르소나는 개인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장치로 이해되지만, 갸루와 왕홍 메이크업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한다. 자아를 숨기는 대신 과장하고 확대함으로써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직장인, 학생, 취업준비생 등 사회적 역할 속에서 살아가는 2030 세대가 메이크업과 패션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선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갸루'가 되고, '왕홍'이 되는 경험은 단순한 분장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체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러한 현상은 SNS 시대의 정체성 감각과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는 하나의 일관된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오늘날에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자아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SNS 프로필마다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사진 필터를 통해 얼굴을 과장되게 변화시키며, 온라인 공간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하는 문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스노우 등 얼굴 변형 필터가 큰 인기를 얻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조사 결과 역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한다. 오픈서베이 데이터스페이스의 '2025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Z세대는 자기 이해 욕구가 매우 강하며, 자기 이해를 돕는 도구에 관심을 가진 비율이 89%에 달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26년 5월 만 13~59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실시한 조사에서도 전체 평균 자기 관심도가 74.4%인 반면, 20대는 81.5%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