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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조장했던 지역 감정은 민주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기성세대가 남긴 지역감정은 이제 인터넷 유행어를 통해 '지역 혐오'로 일상을 파고 들고 있다.  

지역감정의 진화 전라도 갈 땐 여권 챙겨라 : 지역감정이 일베를 거쳐 '지역혐오'로 악화했다
여권 자료사진(왼쪽), 숟가락 자료사진 ⓒ연합뉴스/픽사베이

그렇게 암호로 포장된 지역 혐오의 언어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넘어 기업의 공식 마케팅 채널에까지 스며들었다. 최근 H 홈쇼핑이 공식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여행 홍보 문구가 지역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여권' '숟가락' 등 평범한 단어에 숨겨진 교묘한 지역 비하 

26일 JTBC '사건반장'은 H 홈쇼핑이 공식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광주와 담양 여행지를 소개하며 '여권 챙기지 말고 숟갈 챙겨라잉'이라는 자막을 넣었다고 전했다. H 홈쇼핑은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도 ‘전라도 여행 갈 땐 여권 대신 수저 챙기세요’라는 문구를 달았다.

지역 비하 논란이 일자 H 홈쇼핑 측은 해당 게시물을 즉각 삭제했다. 유류할증료 상승으로 해외 대신 국내 여행을 권장하려는 취지였으며, 전남도청 블로그의 문구를 단순 차용했을 뿐 비하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여기서 언급된 '여권'과 '숟가락(수저)'은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등지에서 호남 지역을 겨냥할 때 쓰는 대표적인 혐오 은어다.

호남을 대한민국과 분리된 별개의 국가처럼 취급하며 여권이 필요하다고 조롱하는 한편, 수저 챙겨라는 표현 역시 호남의 음식 문화가 유명하다는 점에서 출발했지만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를 '가서 밥을 얻어먹는다', '남의 것에 얹혀산다'는 식의 부정적 이미지와 결합시켜 특정 지역민을 비하하는 혐오 코드로 만들었다. 

지난 2020년에도 한 지상파 야구 해설위원이 "광주 가려고 가방에 항상 여권이 있다"고 발언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사과한 전례가 있다.

정치적 목적에 만들어진 '지역 감정'은 저질 농담의 '지역 혐오'가 됐다

이처럼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기원은 1971년 제7대 대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평가가 많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후보의 대결 과정에서 지역 정서는 본격적인 정치 동원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당과 관권 세력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호남 후보가 당선되면 영남은 차별받는다'는 등의 유언비어와 정치적 선전을 퍼뜨리며 지역 불안을 자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영·호남 간 투표 쏠림 현상과 감정적 대립 구도 역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조장된 지역감정은 이후 경부축 중심의 국가 개발 정책과 맞물리며 경제적·사회적 격차로 이어지면서 더욱 악화했다. 영남 지역에는 대규모 중화학 공업 단지가 집중적으로 조성된 반면, 경제개발에서 소외된 호남 지역은 인구 유출과 산업 기반 약화를 겪었다. 이러한 구조적 격차는 미디어와 대중문화 속 왜곡된 지역 이미지와 문화적 낙인으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를 특정 지역의 문제로 왜곡하며 지역 간 감정적 거리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영남·호남 갈등 구조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지역 기반 결집 전략을 반복적으로 활용했다. 김대중·김영삼·노태우·김종필 등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각자의 지역 기반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면서 지역주의 정치가 고착화됐고, 결과적으로 지역감정은 한국 정치 지형의 뿌리 깊은 균열로 남게 됐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일상 속 지역 혐오 표현은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기성세대가 만들어내고 방치해 온 지역감정의 부끄러운 유산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시대와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지역 비하를 넘어 지역 혐오의 형태로 진화해 왔다. 과거 오프라인 중심 사회에서의 지역 비하는 주로 군사정권 시절 기득권의 권력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에서 비롯됐다. 호남을 겨냥해 '뒤통수', 영남에 '꼴통' 프레임을 씌웠고, 충청과 강원을 낮잡아 '멍청도', '감자국' 등으로 비하하는 식이었다.

1990년대 후반 PC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은 이 혐오의 언어가 디지털 공간에 박제되는 계기가 됐다. 익명성 뒤에 숨어 영남을 '개쌍도', 호남을 색깔론에 입혀 '빨갱이', '폭도'와 같이 적대적이고 극단적인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베, 디시인사이드 등 커뮤니티 전성시대를 맞이하면서 지역 비하는 은어와 밈(Meme)의 형태로 재탄생했다.

특정 지역민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분리하는 '전라디언', 지도상의 위치를 빗댄 '7시', 대구 지하철 참사 등 지역의 비극을 조롱하는 '고담 대구' 등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특정 지역의 향토 음식을 비하 수단으로 삼은 '홍어' 같은 표현은 역사적 비극의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악용됐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역 비하는 정치적 대립을 넘어 온라인 공간에서 재미로 소비되는 놀이 문화로 변질됐다.

과거의 표현들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거친 단어였다면 오늘날의 지역 혐오는 평범한 단어의 탈을 쓰고 특정 집단끼리 은밀히 공유하는 교묘한 암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몰랐다'는 변명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 철저한 모니터링 필요 

이번 H 홈쇼핑 사태 역시 이러한 암호화된 혐오 밈을 검증 없이 수용하다 터진 논란이다. 

더 큰 문제는 유행어라는 탈을 쓰고 일상으로 스며드는 혐오 표현을 제어할 제도적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특정 지역민 전체를 향한 혐오 발언은 피해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형사 처벌하기가 매우 어렵다.

과거 코로나19 사태 당시 대구 시민을 향한 혐오 발언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삭제 조치를 내린 적이 있지만, 해외에 서버를 둔 유튜브나 SNS는 수사기관의 협조가 어려워 혐오를 조회수 장사로 삼는 사이버 렉카들을 실질적으로 처벌하기엔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제도적 공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업과 미디어의 철저한 사전 필터링이다.

이제는 '혐오 표현인 줄 몰랐다'는 해명이 사과가 되지 못하는 시대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메시지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업과 미디어라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역사적 맥락과 혐오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 철저히 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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