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회생법원에서 파산관재인으로 일하는 동안 나는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서른이 갓 넘은 젊은 가장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다 무리한 투자의 늪에 빠진 사람도, 채권자들의 독촉 전화를 받으며 숨죽여 하루하루를 버텨온 사람도 나와 마주 앉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같은 말부터 꺼냈다. 마치 빚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파산 신청은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책임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버틴 끝에 내린 선택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AI 이미지. ⓒ허프포스트코리아
그들의 표정에는 회한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눅 든 어깨, 시선을 피하는 눈빛. 재판을 앞둔 피고인 같은 모습이었다. 파산을 신청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혼자 감당했을까. 나는 그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같은 말을 건넸다.
"파산 신청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끝이나 실패도 아니고요.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렸다. 그리고 그 눈빛에 아주 작은 희망이 스며들었다.
26년의 변호사 경력 중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일하면서 매년 평균 약 180명씩 모두 2,400명이 넘는 채무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20대 청년부터 100세 가까운 어르신까지, 의사·애널리스트·예편한 군 장교·중소기업 사장까지 그 면면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거듭해서 망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산관재인으로 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자주 했던 말이 있었다.
"빌린 돈은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현실은 달랐다. 그들은 버티고 또 버티다, 정말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게 된 후에야 비로소 법원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첫마디가 "죄송합니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파산한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파산에 이른 이유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사연들이 더 많았다. 가족의 오랜 병간호로 직장을 잃게 된 사람, 믿었던 친구에게 보증을 섰다가 모든 빚을 떠안게 된 사람, 예기치 못한 질병 앞에 한순간에 무너진 사람.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 믿었던 사람의 배신, 갑자기 찾아온 사업 환경의 급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한꺼번에 몰아쳤을 때, 삶은 너무도 쉽게 흔들린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고,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현실이 되었을 뿐이다.
더 어려운 문제는 파산이 반복되는 경우다. 처음 그런 상황을 접했을 때 나도 솔직히 답답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사연을 들을수록 개인의 의지나 노력 부족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기인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한 번 파산 선고를 받으면 신용이 제한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다시 빚에 기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악순환은 반복됐다. 한 번 넘어진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발판을 주는 대신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 전체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파산과 면책이라는 제도는 삶의 실패가 아니라, 극한까지 버텨온 사람에게 사회가 내미는 기회의 손이다. 파산자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조금만 거두고 일어서는 이들의 노력을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법조문 한 줄, 숫자 하나에 누군가의 남은 인생이 통째로 걸려 있다. 서류에는 채 다 담기지 못했을 그들의 아픈 사연을 마주하며,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쓰라린 실패에 조금 더 관대하고 넉넉한 품을 내어주기를 기대해본다.
글쓴이 왕미양은 변호사로 현재 한국여성리더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3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여성 변호사가 100명 남짓이던 2000년에 법조계에 첫발을 들인 이래, 성남여성의전화 무료 상담을 시작으로 아동·여성·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 활동에 매진해왔다. 2010년부터는 13년 동안 파산관재인으로 2,400여 명의 채무자를 만나며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2026년, 여성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폭력 피해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 지원 공로로 '올해의 서울여성상'을 수상했다. 칼럼을 통해 법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