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살을 빼는 일'은 의지의 문제로 여겨졌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시간을 쪼개 운동을 하며,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돈으로 헬스장을 끊을 수는 있어도, 결국 체중 감량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개인의 끈기와 절제였다. 그런데 이 오래된 공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AI로 만든 헬스장에서 운동 중인 여성과 비만주사제를 맞는 여성.
2026년 4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6년 3월 비만 치료제 '마운자로(성분명 터제파타이드)'의 국내 처방 건수는 22만8199건으로 집계됐다. 2025년 8월 국내 출시 첫 달 1만8579건과 비교하면 약 1128% 증가한 수치다.
약값을 평균 30만 원으로 가정할 경우 한 달 시장 규모는 약 685억 원에 달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주사제임에도, 주 1회 투여 기준 4주분 가격이 27만~60만 원에 이르는 고가 제품이 이 정도 수요를 보인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이 같은 흐름은 '위고비' 등 다른 비만 치료제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이 약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뇌의 특정 수용체를 자극해 식욕을 억제하는 것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먹고 싶다'는 욕구 자체를 줄여버리는 방식이다. 예전처럼 의지로 식욕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욕망의 크기를 낮춰버리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읽힌다. 과거 다이어트는 '노력의 영역'으로 돈으로 보조할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노력의 일부를 약물이 대신해주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운동과 식단 관리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출발선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한때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으로 불린 ADHD 치료제 성분 메틸페니데이트가 '집중력 영양제'처럼 포장돼 불법 판매된 사례가 적발되면서, 이른바 '스마트 드러그'가 공정성 논쟁의 중심에 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의지와 노력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적이라는 결과에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게 된 셈이다.
마운자로(사진)는 몸속 인슐린 분비를 촉진해 포만감을 높이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계열 치료제로 식전·식후 혈당을 낮추고 체중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연합뉴스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태도다. 2025년 조선일보와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정신건강이 악화돼도 약물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응답이 71.5%에 달했다. 이 가운데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응답은 69.4%로, 정신과를 기피하는 이유 중 두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맥락은 다소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뇌에 작용하는 약물’에 대해 분명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이어트나 성적 같은 ‘보상이 확실한 영역’에서는 그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옅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위해 뇌를 건드리느냐’에 따라 약물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는 셈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비만 치료제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해야 했던 영역들이 점점 더 약물이나 기술로 대체될 수 있다면, 그 기준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말이 언젠가 미래에는 '의지도 부족하고, 투자할 생각도 없다'는 평가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변화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의료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노력'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재정의될지, 그리고 그 변화가 어떤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낼지는 아직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예전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었던 것들 의지, 절제, 꾸준함 같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영역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