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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땐 나의 힘으로 자신과 타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를 며칠 동안 고생해 가까스로 살려냈을 땐 그 생각에 확신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도 특별히 더 해줄 수가 없었던 경험들이 쌓이면서 푸르렀던 자부심은 점차 시들고 겸손이 물든다. 그러다 보면 모든 건 결국 다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살렸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실은 환자의 운명이라고.

[Dr. 허지만의 진료실 이야기] 배아의 염색체 이상으로 생기는 '초기 유산' : 의사도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
의사도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이 있다. 다만 환자를 설득하고 서로 감정적 교류를 하는 것도 의사의 중요한 역할로 보인다. 사진은 AI 이미지.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며 운명론을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 질환이 있다. 그중 하나가 임신 12주 미만에서 발생하는 '초기 유산'이다.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유산될 수도 있고, 계속 찔끔찔끔 하혈하면서 불안하게 있다가 결국 유산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의사는 산모에게 절대 안정을 시키거나, 호르몬을 보충해 주는 등 여러 치료를 시도한다.

초기 유산의 가장 큰 원인은 배아의 염색체 이상이라고 한다. 즉, 다르게 생각하면 초기 유산은 사실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배아를 자궁이 배출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염색체 이상이 아닌 다른 이유도 있다는 것은 그걸 '치료'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산부인과 의사 사이에서 치열하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다. 비록 느리지만 과거보단 확실히 많이 발전했다.

어느 날 임신 8주 산모가 질 출혈이 있었다고 내원했다. 속옷에 묻어나는 정도로 양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지금은 멎은 상태라고 했다. 배도 아프지 않아 산모는 병원에 갈까 말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불안해서 병원에 올 수밖에 없었겠다고 공감할 수 있었다.

산모는 근처에서 빨리 진료받기 위해 필자에게 왔지만, 원래 다른 병원에 다니고 있던 분이었다. 시험관 시술 전문병원에서 여러 시도 끝에 어렵게 임신하였다고 했다.

바로 어제 외래에서 초음파로 배아 심장 소리도 듣고 모든 것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오늘 하혈하니 그녀도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우선 초음파로 배아의 심장박동 소리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산모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선생님! 애기 심장이... 왜 이렇게 천천히 뛰어요!?"

배아의 심박수는 분당 60~70회였다. 성인 기준으로는 정상 범위이다. 그러나 태아의 심박수는 보통 120회 이상이다. 특히 임신 초기에 배아 심박수는 최소 100회 이상이어야 한다. 100회 미만의 심박수는 유산 등 좋지 않은 예후를 시사한다.

의사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산모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배아의 심장이 어제처럼 힘차게 빠르게 뛰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진찰을 마치고 남편을 불러 부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배아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며, 자연유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산모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남편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어제 진료 봤던 의사는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안 좋아질 수 있는 건가요? 전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의사 둘 중 하나가 오진한 거 아닙니까?"

난 차분하게 대답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린 우연히 자연유산으로 가는 과정을 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산이라고 해서 정상 박동으로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멈추는 건 아닙니다. 만약 계속 초음파를 보고 있다면 배아 심장박동이 서서히 느려져 결국 멈추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겠죠. 마치 꺼져가는 잔불처럼요. 하지만, 우린 보통 초음파를 계속 볼 수 없으니 흘러가는 시간 중 단편만 봅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상황도 생기는 겁니다."

8주 배아의 심장은 느리지만, 멈추지는 않았으므로 섣불리 생명의 종료를 선언할 수는 없었다. 현재로선 일단 귀가하여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다만, 부부에겐 '유산'이라는 미래가 정해진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필자는 둘의 곁에 말없이 서 있었다. 침묵은 짧고도 길었다.

며칠 뒤 외래에서 초음파를 다시 보자고 했으나, 산모는 오지 않았다. 문득 안부가 궁금하여 전화를 해보았다. 그녀는 차분하지만,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받았다.

"아 선생님! 안 그래도 제가 전화를 먼저 드려야지 생각했는데요. 이렇게 전화를 주셨네요?"

"네. 그런가요? 사실 전 다음 날 병원에 오실 거로 예상했는데, 안 오셔서 걱정되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맞아요. 선생님. 사실 저 진료 봤던 그날 새벽에 결국 또 하혈해서 원래 다녔던 난임 병원에 갔어요. 거기서 유산을 진단받았습니다."

"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나 바뀌지 않은 운명에 필자도 모르게 목소리가 풀이 죽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가 밝게 말했다.

"선생님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전화라도 꼭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당시 제가 유산을 막을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아니에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설명을 잘 해주셔서 유산이 운명적인 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당시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다음 날 결국 유산되었을 때 선생님의 조언으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이 큰 위로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편도 선생님을 뵙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몸 잘 추슬러서 다음엔 좋은 소식으로 다시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음'이라는 말에 복받쳐 오르는 그녀의 감정이 전화기를 넘어 내게 흘러 들어왔다. 우린 감사의 인사를 좀 더 나눈 뒤 통화를 마쳤다. 수화기를 올려놓는 손끝까지 온기가 전해짐을 느꼈다.

글쓴이 허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안산병원에서 산모입원 전담 임상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미래아이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따라가며 시기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자 한다. 아울러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낀 생각과 도덕적 딜레마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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