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봄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든 일본 시민들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의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며 응원봉을 높이 치켜들었다.
일본의 누리꾼들이 SNS에 한국 집회 응원봉 사진(왼쪽)과 3월25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앞 응원봉 시위 사진을 올렸다. ⓒ엑스(X)
일본 시민들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취임 직후부터 평화헌법 개헌을 밀어붙이자 '평화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해 올해 더욱 조직적이고 힙한 문화적 저항에 나섰다. 일본의 응원봉 시위는 2024년 말 소규모 집회에서 등장한 뒤 2025년 들어 정치 이슈와 맞물리며 젊은층 사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일본 시민들이 지키고자 하는 평화헌법 9조는 과거 태평양 전쟁 당시 군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조항이다.
'일본 헌법 9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기타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 때문에 일본 시민들에게 개헌은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전쟁 가능성의 문을 여는 변화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미국-이란 전쟁 가운데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압박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반대 여론은 더욱 거세지는 분위기다.
일본 국회의사당 앞 시위 현장은 마치 콘서트 대기줄을 방불케 했다. 한국 아이돌 세븐틴, 엔시티(NCT)의 응원봉은 물론 일본 아이돌 스톤즈(SixTONES), 미세스 그린 애플(Mrs. GREEN APPLE)의 응원봉까지 가득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캐릭터 굿즈까지 더해지며 '오타쿠의 성지'를 연상케 하는 시위 풍경이 펼쳐졌다. 사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다. 이는 2024~2025년 한국의 계엄 반대·탄핵 집회에서 나타난 '축제형 집회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한 일본 네티즌이 엑스(X, 옛 트위터)에 한국 시민들의 집회 사진을 올렸다. ⓒ엑스(X)
올해 초 일본 총리 관저 인근에서 시작된 응원봉 시위가 열기를 띠면서 일본 SNS에는 '#오타쿠_전쟁_막으러_왔다'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됐다. 한 일본 누리꾼은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터)에 지난해 함박눈 속에서도 집회를 이어갔던 한국 시민들의 사진을 공유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1년 전 한국에서 계엄령을 저지하며 눈 속에서 항의하던 시민들을 보았고,
1년 뒤 일본의 지금을 본다. 한일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시민'이었다고 확신한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촛불 혁명이 '광장의 기적'으로 불렸다면, 지난해 내란 반대 집회에서 나타난 응원봉 시위는 각기 다른 취향을 지닌 팬들이 만들어낸 '빛의 연대'가 빚어낸 새로운 집회 형태로 평가된다. 평화롭고도 강력한 힘을 지닌 K-집회 문화는 이제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의 집회 문화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러 나라에서 롤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둥어로 울려 퍼졌다. 한국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 등이 홍콩 시위 운동가들 사이에서 공유되며 강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2020년 태국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걸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군부 독재에 맞서는 젊은 세대의 투쟁가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10월 16일 태국 경찰이 반정부 시위대를 물대포로 강제 진압했을 때, 태국 내 K-팝 팬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위대와 관련 단체를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2030세대의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또한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서는 '미얀마에 광주 정신을'이라는 피켓이 등장했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SNS에서 확산됐다. 특히 현장에서는 한국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국어 피켓까지 등장했으며, 한국 시민사회 단체들이 SNS를 통해 최루탄 대응법 등 과거 경험을 공유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국가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 시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24년 12월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응원봉과 촛불을 켠 채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신들은 K-집회 문화의 성공 비결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거대한 분노 속에서도 물리적 파괴나 폭력 없이 질서를 유지하며 권력 교체를 이끌어낸 '비폭력성', K-팝 팬덤 응원 문화와 결합해 집회 참여의 장벽을 낮추고 누구나 쉽게 집회에 나갈 수 있도록 만든 '축제형 연대', SNS를 통해 빠르게 조직하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확산하는 '디지털 조직력'이다.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은 뒤 수십 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한국은 압축적 민주화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형성된 비폭력적이고 축제적인 집회 문화는 선도적 모델로 자리 잡았고, 포퓰리즘과 정치적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일부 서구 국가들과 대비된다. 정치적 효능감이 높은 한국의 K-집회 문화는 이제 다른 나라 시위대에게 민주적인 저항 매뉴얼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