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를 포함해 주요 AI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발표를 앞두고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이른바 'AI 버블(거품론)'이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 변동성이 커지고 빅테크의 대규모 투자에 관한 수익성 의문이 제기되고 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콘퍼런스콜마다 아니라고 하지만 'AI 거품이 곧 터질 것'이라는 걱정이 시장 곳곳에서 제기된다.
물론 우려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현재 AI 인프라 투자의 상당 부분은 소수 빅테크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이들의 투자 지속 가능성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생성형 AI 서비스의 수익화가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데이터센터 투자 축소와 반도체 수요 둔화로 이어지는 ‘역전된 사이클’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삼성전자가 올해 엔비디아 GTC 2026에서 공개한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E 제품 전시 모습. ⓒ삼성전자
이와 연계해 메모리 시장 내부의 구조 역시 낙관적 시각만 보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시각도 나온다. 고대역폭메모리(HBM)는 AI 시대의 핵심 자산이지만 동시에 특정 고객군 의존도가 높은 시장이다. 메모리가 매우 과점적인 시장이라고 할지라도, 빠르게 짧아지고 있는 기술 사이클 역시 장기 투자에 있어 중요한 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현장은 이러한 시장의 의구심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최근 일주일 사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행보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선제적 베팅’에 가깝다.
삼성전자는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계획'을 통해 올해 시설 및 연구개발(R&D)에 모두 110조 원을 투자 집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 투자의 목적도 명확히 했다. 'AI 반도체 시대 주도권 확보를 위해'. SK하이닉스 역시 100조 원 규모의 순현금을 확보해 미래 성장에 매진하겠다고 강조하면서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추진을 공식화했다.
두 기업이 합쳐 210조 원에 이르는 자본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 숫자의 의미는 단순한 투자 규모를 넘어선다. AI 반도체 시장의 경쟁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범용 메모리 중심의 공급 경쟁에서 이제는 고객의 설계 단계부터 함께하는 '커스텀(Custom) 솔루션' 중심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HBM4 이후 시장은 사실상 '강력한 협력'을 기반으로 한 생태계 경쟁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한 번 채택된 기술과 구조는 쉽게 교체되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쏟아붓는 자금은 생산능력 확대를 넘어, 향후 10년간의 기술 표준과 고객 생태계를 선점하기 위한 비용이다. 수요의 단기 변동성은 피할 수 없지만, 수요가 회복되는 순간 ‘누가 선택될 것인가’는 미리 결정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투자의 성격 또한 과거와 다르다. 쉽게 말해 '규모의 경제'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고부가 영역에 집중된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자본 효율성을 고려한 구조적 투자인 셈이다. 미국 ADR 상장은 거대한 글로벌 자본을 직접 끌어들여 이전의 경기 의존형 투자 방식에서 벗어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결국 시장의 질문은 만약 AI 거품이 걷힌다면 그 이후에도 어떤 기업이 구조를 지배할 것인가다. 흔히 승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결정된다고 한다. 구조를 선점한 투자는 그 산업의 '겨울'이 찾아와도 결과로 남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210조 원은 수요를 낙관한 베팅이라기보다 변동성까지 전제한 채 ‘선택받을 위치’를 확보하려는 자본의 방향이다. 거품을 경고하는 시선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논쟁에 머무는 사이 시장의 권력은 이미 이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거품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바람이 불 때 어떤 이는 벽을 쌓고 어떤 이는 풍차를 만든다'는 네덜란드의 속담처럼, 지금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우는 수백조 원의 거대한 풍차는 앞으로 찾아올 진짜 AI 시대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