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미래에셋생명의 대규모 자사주 소각을 통해 수년 동안 주식 시장을 달궜던 '자진 상장폐지설'의 재무적 유인을 스스로 제거했다.
단순한 주주환원 정책을 넘어, 자진 상폐를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자사주를 스스로 없애버림으로써 상폐 시나리오의 현실성을 크게 떨어트린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이 미래에셋생명 '자진상폐'의 경제적 유인을 스스로 크게 낮췄다. ⓒ허프포스트코리아
◆ 개장 2분 만의 상한가, 시장 환호한 ‘자사주 93% 소각’의 진짜 의미
미래에셋생명은 4일 정규장 종료 후 보유 자사주의 93%에 달하는 6296만 주를 전격 소각한다고 공시했다. 이는 전체 보통주 발행 물량의 23.6%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시 다음날인 5일 장이 열리자마자 미래에셋생명 주가는 상한가인 1만3570원까지 직행했다. 미래에셋생명 주가의 고공행진은 6일에도 이어졌다. 이날 코스피가 0.39% 하락하며 시장이 지지부진했던 것과 달리, 미래에셋생명 주가는 전날보다 7.37% 오른 1만4570원에 거래를 끝냈다.
금융권에서는 이와 같은 주가 급등이 단순히 주식 수 감소에 따른 주당순이익(EPS) 상승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동안 미래에셋생명 주가를 짓눌러왔던 가장 큰 리스크인 ‘대주주의 싼값 공개매수(자진 상장폐지)’ 우려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는 안도감이 시장에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 95% 코앞에서 멈춘 상폐 시나리오, 3년 무배당에 쏠렸던 의구심
그동안 주식 시장에서는 미래에셋생명의 자진 상장폐지설이 끊이지 않았다. 대주주와 계열사의 ‘쌍끌이 매집’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2024년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컨설팅 등 주요 계열사들은 지속적으로 장내에서 미래에셋생명 주식을 사들였다. 올해 2월12일 미래에셋생명이 공시한 ‘최대주주등소유주식변동신고서’ 기준 최대주주인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그룹 계열사 등이 보유한 지분은 모두 60.74%에 이른다.
한국거래소 상장규정상 자진 상폐 요건은 최대주주 지분 95%다. 숫자만 보면 무려 35%의 지분을 더 매수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한국거래소 규정상 자진 상폐 요건 95%의 모수에서 ‘자기주식’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생명은 전체 발행 주식의 26.29%를 자사주로 보유하고 있다. 이 주식을 제외하면, 최대주주와 계열사들의 지분율은 80% 이상으로 치솟는다. 자진상폐요건까지 남은 지분율 역시 15% 정도로 급감하는 것이다.
여기에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무배당 기조를 이어가면서 소액주주들의 불만도 높아져갔다. 시장에서는 “상장 유지 의지가 부족하다”, “자진 상폐를 앞두고 현금 유출을 막으려는 꼼수”라는 등의 의구심도 나왔다.
◆ 자사주 소각의 수학적 역설, 이제 상폐하려면 돈이 더 많이 든다
하지만 이번 대규모 자사주 소각으로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자사주 소각으로 미래에셋생명의 자진상폐에 필요한 자금의 규모가 크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생명에 따르면 이번 소각으로 미래에셋생명의 전체 발행주식 수는 약 32%, 보통주 기준으로는 약 23.6% 줄어들게 된다. 모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룹 계열사들의 합산 지분율은 기존 60% 수준에서 약 80% 정도로 기계적으로 상승한다.
지분율만 보면 상폐 요건인 95%에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자사주를 불태워 없애든 금고에 쌓아두든 상폐 요건 관련 모수에서는 똑같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대주주가 시장에서 일반 주주들로부터 추가로 매수해야 하는 주식 물량은 소각 전이나 후나 완벽하게 동일하다.
문제는 주가다. 과거 주가가 9천 원 안팎일 때는 10%포인트 정도의 지분만 시중에서 매입하면 95% 도달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역대급’ 자사주 소각 결정으로 주가는 4일 종가 기준 1만440원에서 6일 종가 기준 1만4570원으로 단 2거래일만에 39.6% 뛰었다. 상폐의 경제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지배구조 개편 대신 '밸류업' 정공법 선택하다
금융권에서는 박현주 회장이 무리한 지배구조 개편의 우회로를 버리고 '밸류업'이라는 정공법을 선택한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박 회장 특유의 '주주 친화 철학'이 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회장은 평소 한국 증시의 저평가 문제 해결과 밸류업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인물이다.
그는 2021년 1월 미래에셋대우 공식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회사 주가에 책임감을 ‘팍팍’ 느낀다. 저는 주주들에게 매우 잘하려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2023년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도 “주주환원 정책에 더 신경 쓸 수 있게 됐으며 자사주 매입도 지속적으로 할 생각”이라며 확고한 의지를 내비쳤다.
자신의 평소 지론을 실천할 적기라는 판단에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가 한몫을 했다. 최근 자사주 의무 소각 등의 내용을 담은 3차 상법 개정안이 국무회의 심의를 통과하는 등, 행정부와 입법부가 한목소리로 밸류업을 주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굳이 시장의 반발을 감수하며 자진상장폐지라는 무리수를 둘 명분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미래에셋생명은 이번 자사주 소각 결정을 통해 단숨에 보험업종 ‘밸류업 스토리’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며 “최근 미래에셋증권 주주환원 정책 공개와 함께 그룹 차원의 밸류업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