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가 알린 두바이의 경제 기적

실제로 두바이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석유 이후의 두바이 경제였다. 정신 나간 지도자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취미 생활로 메이단 경마장을 건설하고 두바이 월드컵을 개최했을까? 혹시 두바이의 연간 13% 고도성장에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이 꼭 팔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 월드컵을 경제성장의 전략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2017-10-23     최현우
ⓒ두바이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

1. 메이단 경마장

이 호화로운 경마장에서 1월부터 3월까지 1년에 달랑 3개월 경마가 열린다. 그것도 목요일 저녁에만, 한 주에 한 번 사용한다. 수백 마리의 말이 있고, 한 마리당 천 평의 초지가 제공된다.

그런데 이 경마장을 운영하는 수입은 제로다. 대부분 경마장은 경마꾼들이 경주에 돈을 걸고 그렇게 베팅한 돈의 적게는 20퍼센트 많게는 30퍼센트를 따로 떼고, 그 가운데 일부를 운영 수익으로 잡는다. 하지만 이슬람국가인 두바이에서는 도박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경주하는 12일 동안 경마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전혀 없다.

어디든 땅만 파면 쏟아지는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정신 나간 중동 국왕의 천박한 취미 생활이라는 것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도 이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 경주가 석유를 기반으로 흥청망청 사막에 돈 뿌리는 만수르의 개그(Gag)로 생각했다. 그리고 두바이 월드컵은 현재의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가 죽으면 그 날로 끝이라고 확신했다.

2. 두바이라는 나라

외국인에게 나라 자랑할 때 내세울 게 없는 나라는 과거의 유산, 조상이 이루어놓은 걸 내세운다. 잘 나가는 나라는 현재를 자랑한다. 아니 자랑할 필요도 없이 모두 알아서 치켜세운다. 오만과 인접한 곳에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이 아는 두바이가 있다. 페르시아 반도에 위치한 사막 국가로 산유국이며 이슬람 국가, 두바이와 오만은 다른 게 없다. 역사적으로 오만인은 두바이인을 우습게 알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은 칼리프, 오만의 통치자는 왕(king)이라 부르지만, 두바이의 통치자는 족장이라는 셰이크(sheiks)라 부른다. 그런데 한 나라는 인당 국민소득 6만 불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진국이고 다른 한 나라는 수도권 대학에서 아라비안나이트와 유향으로 소개해야 한다.

세계인이 가장 많이 찾는 중동 도시는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출생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다. 이슬람 신도인 무슬림은 살아있는 동안 메카를 참배하는 것이 의무이고 방문하기를 꿈꾼다. 이런 열망으로 매년 300만 명이 메카를 찾는다. 90년대까지는 중동의 관광 수요는 이것이 전부였다. 현재 중동을 아는 사람들은 두바이를 '메카보다 더 확실한 관광 메카'라고 부른다. 두바이를 찾는 관광객은 메카의 세배, 연간 천만 명에 이른다. 무엇을 보려고, 왜 세계인이 두바이를 찾을까?

팜 쥬메이라

남의 일이지만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 의문점은 있었다. 인도양 페르시아 앞바다에는 파도가 없을까? 여름 태풍은 없을까?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 항해하다가 폭풍에 난파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유독 두바이 앞바다에는 365일 잠자듯 잔잔할까? 만약 우리나라 같은 여름 태풍이 온다면 그 모래섬의 아슬아슬한 리조트는 어떻게 될까? 단순히 해안을 메꾸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야자수 모양 섬을 만들면 바다 물길이 바뀌어 해안선의 침식이 일어날 텐데, 시간이 지나도 괜찮을까? 야자수 형태 섬을 원형으로 둘러싸면 바닷물이 움직이지 않아 썩은 물이 될 텐데 최고급 리조트 앞에 썩은 물이 고여 있다면 누가 살까?

부르즈 칼라파

두바이 인구는 200만인데, 외국인이 얼마나 와야 이 규모의 쇼핑몰이 유지될까? 이 또한 적자 보며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무한정 쏟아붓는 것일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쯤에서 두바이 경제통계를 확인해야 한다. 2016 기준 아랍에미리트는 인당 국민소득이 6만 7천 불이고 세계 7위를 차지한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 7개 토후국 중에도 최고수준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아랍에미리트 석유는 95퍼센트 아부다비에 있고, 두바이의 부존량은 5% 미만이다. 그나마 2020년에는 고갈된다. 석유 수출이 두바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3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인당 국민소득 6만 7천 불 가운데 6만 5천 불은 석유가 아닌 곳에서 버는 것이다. 적어도 팜 쥬메이라, 버즈 칼라파, 메이단 경마장, 두바이 월드컵과 같은 투자가 석유에서 나오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서 펑펑 돈 뿌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던 중에 1966년, 석유가 발견되었지만, 생산기간은 2020년으로 고갈이 눈앞에 있었다. 석유가 나는 동안 석유 없이 사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두바이의 미래는 없었고, 두바이 국민과 지도자는 탈석유 경제개발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실제로 두바이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석유 이후의 두바이 경제였다. 여기까지 알고 나면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정신 나간 지도자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취미 생활로 메이단 경마장을 건설하고 두바이 월드컵을 개최했을까? 혹시 두바이의 연간 13% 고도성장에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이 꼭 팔요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 월드컵을 경제성장의 전략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두바이 국왕이며 아랍에미리트 부통령인 셰이크 모하메드 부부가

3. 말과 셰이크 모하메드

모하메드는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말을 탔고,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말과 놀았다. 점심 후에는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는 것이 일과였다. 그보다 더욱 아련한 기억이 있었다. 2016년 두바이월드컵 개막식에서 셰이크 모하마드는 그 기억을 이야기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런 분위기에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젖먹이 때부터 국정 운영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는 1958년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두바이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항만건설에 전념했다. 하지만 두바이에는 건설자금이 없었다. 마침 발견된 석유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라시드 항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더 큰 규모의 항구를 만들면서 두바이는 굶주림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기반을 갖추었다.

"경마의 종주국은 아랍인데, 왜 영국을 종주국이라고 할까? 아랍의 경마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아랍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한 것만 아니라 국가와 아랍 전체를 위한 것이다. 유럽의 마주, 명마들과 경쟁하면서 나는 아랍을 대표한다. 그들과 경쟁에서 이겼을 때 나는 아랍의 자부심을 느낀다."

그날 밤, 모두가 떠난 해변 경기장에서 소년은 암말과 함께 누웠다. 말의 배를 쓰다듬으며 밤새워 거듭거듭 말과 이야기 하며 잠들었다.

페르시아 바다 위에는 별빛이 쏟아졌고, 암말의 따뜻한 체온과 편안한 숨소리가 깊은 잠으로 소년을 이끌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1968년 다시 6개월 과정의 영국 몬스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귀국 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쏟아졌다. 적대관계에 있던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협력하여 아랍에미리트를 건국하기로 했고, 모하메드는 22세 세계 최연소로 아랍에미리트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1990년 셰이크 라시드가 사망하며 장남인 셰이크 막툼 빈 라시드 알막툼이 두바이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1995년부터 사실상 국정은 3남인 현재 국왕 세이크 무하마드가 운영했다. 2006년 장남인 형이 사망하면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2010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160km 말 마라톤(인듀어런스) 경주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다. 두 번째 아내 또한 바레인의 장애물 경기 승마선수로 승마에 대한 자문을 해주다 결혼에 이른 것으로 유명하다. 부인은 2000년 요르단 대표로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고 이후 8년간 국제승마연맹(IEF)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자녀 또한 두바이 왕족의 전통에 따라 승마를 배웠고 아랍에미리트를 대표하는 승마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폐하, 오늘 남쪽으로 갔던 우리 군대가 적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어 또 다른 전령이 도착했다.

"경사로다. 전령에게 술과 음식을 주라. 산모와 산파, 시녀들에게 선물을 내릴 것이다."

"폐하, 방금 폐하의 말이 경마대회에서 우승하였사옵니다."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아들이 승마 지구력경기에서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하메드는 직접 카타르로 가서 전 경기를 참관했다. 왕자는 개인 및 단체 금메달을 땄는데 아들이 금메달을 따자 아이처럼 뛰어오르며 "내 생애에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마주의 역할도 바꾸었다. '마주는 마주실에서 샴페인 마시며 담소나 나누다가 경주 5분 전에야 예시장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영국, 일본의 마주들과는 달리 마방을 직접 보고, 말이 무엇을 먹는지 알려고 했고, 수의사가 어떤 치료를 하는지 물었다. 조교사들이 놀랄 만큼 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조교사와 말 관리사, 기수를 고용인이 아니라 함께 말을 보살피는 파트너로 대했다.

두바이 국왕이자 아랍에미리트 부통령, 아랍에미리트 총리이자 수많은 국영기업을 이끄는 CEO지만 셰이크 모하메드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승마인'으로 소개하는 사람이다. 입버릇처럼 "경마의 품격이 국격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두바이월드컵 창설과 운영이 졸부의 허영이나 천박한 취미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바이 국왕 세이크 모하메드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4. 두바이 경제와 두바이 월드컵

TVG, HRTV가 생중계하고 미국의 ABC 방송이 중계한다. 50 디램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경마장에는 베팅이 없다. 경주만 즐기는 대회다. 총상금 3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360억의 상금이 걸린 9개 경주가 열린다. 8개 경주는 세계 공통의 경주마 더러브렛이 출전하는 경주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수 아라비아 말이 출전하는 경주다.

이 화려한 메이단 경마장과 두바이월드컵에 대해 그럴싸한 소문과 오해가 있다. "청년기의 셰이크 모하메드는 영국에 유학했는데 근처에는 너무나 유명한 뉴마켓 경마장이 있었다. 그는 경마에 심취해서 경마가 열릴 때마다 경마장에 있었다. 하지만 중동의 왕자임에도 귀족인 영국 마주들은 그를 대접해주지 않았다. 마주가 될 수도 없었고 말을 살 수도, 자신의 말을 경주에 출전시킬 수도 없었다. 두바이에 석유가 발견되자마자 그는 경마장을 짓고, 가장 비싸고 좋은 말을 사 모으고, 자신을 무시했던 유럽인을 상대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쇼, 가장 거대한 경마대회를 열었다"라는 오해다. 사실과 많이 다르다.

아랍에미리트 석유의 95퍼센트는 아부다비에 있고, 두바이의 부존량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2020년이면 고갈되므로 석유가 있는 동안 석유 없이 살 수 있는 경제구조를 구축하지 못하면 두바이는 20세기 초의 굶주림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급박한 경제 상황을 앞에서 설명했다. 부왕의 항만건설로 최소한의 생존기반은 마련했지만, 번영과 성장에는 부족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부동산, 관광, 금융, 물류 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런 산업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두바이에서 나는 석유 수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바이는 이런 자금을 거의 해외에 의존하는 외부자금의존형 경제개발이 불가피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를 알리기 위해 고심했다. 친분 있는 영국 상류층을 통해 여러 차례 매체에 두바이 특집을 마련하고 직접 발로 뛰며 두바이를 알렸지만, 95년까지 두바이를 아는 사람은 중동국가와 두바이를 통치했던 일부 영국인뿐이었다. 두바이를 알리기 위해 자동차 F1 경주, 프로골프 투어 데저트 클래식, ATP 테니스대회, 낙타경주, 드론경주를 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2017년 현재 UN 회원국은 193개, 국제법상으로 242개의 나라가 있다. 도시는 이 숫자의 수십 배가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나라나 도시는 얼마나 될까? 투자하고 싶은 도시는 얼마나 될까? 알지도 못하는 나라나 도시는 가지도 않을뿐더러 투자는 더더욱 않는다. 그래서 나라마다 도시마다 자신의 지역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경기장을 지어주며 프로스포츠팀을 유치하고, 프로스포츠가 발달하지 않은 곳은 엑스포나 월드컵, 올림픽을 유치한다. 천문학적인 돈이 들지만 도시나 나라를 세계에 알리려면 불가피한 선택이다. 한국과 서울 또한 올림픽과 월드컵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바이는 사막 국가이기 때문에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유치할 수도 없을뿐더러 유치한다 해도 막대한 시설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기 후 시설을 활용할 방안도 없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 경마는 영국의 전통을 고수하는 스포츠로 인식되었다. 조교사와 기수는 자기 나라에서만 일했고, 국제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마를 글로벌 스포츠로 만든다는 최초의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었다.

현대 경주마의 조상이 아라비아 말이고, 아라비아 말은 베두인이 기르던 말이고,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사람은 베두인족의 후손인데 영국에서 경주하는 경마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경마는 수천 년 동안 영국이 아니라 아라비아인들의 생활 스포츠였다. 역사적으로 아랍인에게 말을 타고 빨리 달리는 것은 생존에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평소에도 빨리, 멀리 달리는 연습을 했었고, 축제 때면 경마대회가 있었다. 아랍인들은 경마 때문에 40년간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996년 세계에서 가장 큰 상금이 걸린, 가장 화려한 두바이월드컵 클래식이 열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오래 달리는 말이 참가했고 그 말들 가운데 '시가'라는 미국말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시가를 부를 때 그냥 '시가'라 부르지 않고 '위대한 시가(Cigar The Great)'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인에게 시가의 인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말이 16연승 했을 때 3만 4,000명의 관중이 20분간 기립박수를 보내는 바람에 시가(Cigar)는 20분간이나 한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고 한다.

1회 두바이월드컵 개최 이후 두바이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역사상 유례 없는 연평균 13퍼센트의 성장을 기록했다. 고도 성장기 중국의 성장률이 9퍼센트였음을 감안하면 눈부신 경제성장률이다. 팜 쥬메이라, 부르즈 칼라파, 에미리트 몰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이 몰려들었고 개발된 부동산은 깨끗하게 분양할 수 있었다. 관광객이 두바이에 모이기 시작했고, 금융 산업이 두바이에 둥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바이의 혁신적인 규제철폐와 친기업 정책이 거들었다.

"나는 사막에 조그만 나무를 심었다. 몇 년 뒤 수많은 새가 그 나무에 둥지를 지었고 나중에는 나무가 자라면서 다른 새들이 둥지를 지었다. 그 그늘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랐다."

셰이크 모하메드 스스로 두바이월드컵을 '두바이를 세계에 알리고 세계인이 두바이에 투자하고 아랍의 관광 중심이 되도록 한 촉매'라고 평가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 월드컵 창설을 메마른 사막에 작은 나무를 심은 것으로 비유했다. 그는 아랍 세계에서 알려진 시인이다.

승마 리더십은 두바이의 통치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런 혁신적인 방식으로 그는 경마 경주에서 4,000승 이상을 거두었으며, 스테이크 경주 1,000승, G1 경주 240승 이상을 거두었다.

두바이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는 분초를 나누어 사용하는 일 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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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스맨(Horseman) 셰이크 모하메드

무엇인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남들과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은 사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 남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생활한다.

연설문 한 문장도 직접 쓰지 못하는 지도자, 대필을 당연시하는 지도자들이 즐비한 것이 현실이다. 책임져야 할 일은 부하에게 미루고, 공은 자신이 독차지하는 동양의 지도자에 익숙한 우리에게 셰이크 모하메드는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승마인의 눈으로 볼 때 셰이크 모하메드가 부러울까?

걸음마도 배우지 못한 아들을 안아 말에 태우고 습보로 사막을 뛰는 경험을 갖게 한 아버지를 가진 것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암말을 직접 고쳐서 훈련하며 경주에 참가하고, 함께 페르시아 해변의 별이 쏟아지는 밤을 보낸 기억이, 분초를 다투며 일하는 사람인데도 해마다 승마 경기에 참여하는 승마인의 열정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마방에서 말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그의 '말 사랑'이 나는 한없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