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일이다. 2012년 초, 정 부회장은 한 디자인 전문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정 회장은 기자와 얘기를 나누던 중 고백했다.
"디자인 평균 비용이 수십만 원이던 현대카드 출범 초기에 카드 디자인에 억대 비용을 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스스로 고백한 '미친 짓', 정 부회장은 왜 그랬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고, 나는 그래도 한다."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이사 부회장이 2020년 12월14일 현대카드 어플리케이션 'DIVE'를 통해 현대카드의 마케팅과 브랜딩에 관해 강연하는 모습. ⓒ현대카드
현대카드는 지난 12일, 세계 3대 디자인 상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 소식을 알렸다. 프리미엄 카드 '디 오렌지(the Orange)'가 본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현대카드는 지난 4월에도 'iF 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했다. 역시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 상이다. 구리, 벨벳, 새틴을 카드 플레이트에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신용카드 라인업 '현대카드 부티크(Boutique)'가 대상이었다.
현대카드가 카드, 그러니까 실물 카드 디자인으로 '글로벌하게' 주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대카드는 2001년 다이너스 클럽 코리아를 인수한 이래 미니 카드, 투명 카드, 세로 카드 등 기존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형태의 카드 디자인을 선보였고 여러 기업 및 아티스트와 협업해 차별화된 디자인을 시도해 왔다.
세게 3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본상을 수상한 현대카드 프리미엄 카드 '디 오렌지(the Orange)' ⓒ현대카드
정 부회장은 최근 세계적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며 그들이 직접 디자인한 신용카드 라인업을 연이어 공개했다. 지난 9월엔 '바나나 작가'로도 유명한 이탈리아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협업해 신용카드에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이라는 재치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
2025년에는 미국의 아티스트 톰 삭스와 함께 작업하며 '구멍이 뚫린' 카드를 출시하기도 했다. '톰 삭스' 카드는 연회비와 별도로 발급 비용으로만 최대 10만 원을 추가 지불해야 했지만 출시 한 달 만에 발급량 1만 장을 기록하며 소비자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
단순히 유명 작품을 카드에 옮긴 수준이 아니라 신용카드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정 부회장은 신용카드 디자인에 실험을 거듭하며 소비자들에게 '현대카드' 하면 '디자인'을 떠올리게 할 만큼 견고한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했다.
현대카드가 지난 9월 네이버와 함께 선보인 ‘네이버 현대카드 Edition3’는 카드 디자인에 대한 현대카드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일본 도쿄와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창작자 그룹 세카이(CEKAI)와 협업해 카드가 움직이는 듯한 모션 그래픽을 구현했고 디자인 구상부터 실물 제작까지 1년 넘게 100여 개 이상의 시안을 검토했다.
특히 현대카드는 플레이트 소재와 패키징, 실물 구현 가능성까지 프로젝트 전반을 총괄 및 주도하며 외부 창작자의 감각을 실제 카드에 구현하는 과정에서도 디자인 역량을 발휘했다.
현대카드는 2026년 9월 이탈리아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협업해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컨셉의 신용카드를 출시했다. 신용카드 발급자는 '카텔란 왕국'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는 재치있는 서사를 담았고, 카드 발급자 개인 사진을 첨부할 수 있다. ⓒ현대카드
카드 디자인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지를 두고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카드 디자인이 카드사의 수익성으로 직결되기 어렵고 혜택, 연회비, 고객 충성도 등 디자인 이외의 다양한 요인이 수익 성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 부회장은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카드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애정과 집요와 뚝심을 드러낸 게 15년 전의 인터뷰다. 스스로의 행동을 '미친 짓'으로 규정했던 그 인터뷰 말이다.
"그건 나도 모르겠고, 나는 그래도 한다...!"
정 부회장의 확고한 디자인 철학은 그러나, 모바일 페이의 급속한 발전과 얼굴 인식 결제 시스템의 확대로 인해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2026년 5월8일(현지시각) "토스 페이스페이의 가맹점 확대와 이용자 수 증가가 결제에 필요한 물리적 카드를 장기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보도하며 실물 카드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놨기 때문이다.
제2의 앤디 워홀이라 불리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톰 삭스가 디자인한 현대카드의 4가지 카드 디자인. 메탈, 나무 등의 재료를 이용해 카드를 디자인했고, 카드에 구멍이 뚫려 있어 끈을 매달아 카드 목걸이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연회비와 별도로 요구되는 추가 발급비에도 불구하고 현대카드의 '톰 삭스 에디션'은 소비자들의 높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현대카드
하지만 '지갑이 사라지는 시대'에 정 부회장의 디자인 철학이 역설적으로 신용카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모바일과 비대면 결제가 일상화된 디지털 환경에서 사람들은 ‘직접 보고 만지는 가치’를 찾으려 하고 이로 인해 카드사가 차별화된 카드 디자인을 고객과 정서적 접점을 형성하는 주요 전략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물성매력'을 새로운 산업 트렌드로 짚었다. 일상생활 대부분이 모바일과 비대면으로 해결되는 시대에 물질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는 '실질적 경험'을 여전히 원한다는 것이다.
또 결제 기술 기업 이데미아의 북미 결제 서비스 책임자 제임스 수프린은 2025년 4월15일 팟캐스트 페이먼츠저널을 통해 "디지털 경제가 성장해도 실물 카드에는 개인화, 고급 소재, 차별화된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와 물리적 접점을 만드는 역할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카드사가 디자인과 프리미엄 상품으로 고객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분석하며 실물 카드 디자인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전망했다.
현대카드는 사용자가 신용카드를 꺼내는 순간을 즐겁게 만들고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카드 디자인은 앞으로 더욱 중요한 전략이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현대카드만의 디자인 언어를 통해 회원들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