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지하철에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을 비롯해 소리나 빛 등 감각 자극에 민감한 이용객들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진정 공간(Calm Space)’이 설치됐다. 이동의 문턱을 낮추겠다는 취지에는 박수가 나왔지만, 정작 공개된 공간을 본 일부 당사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런던교통공사는 9월4일(현지시각) 일링 브로드웨이(Ealing Broadway)역과 코벤트 가든의 런던교통박물관(London Transport Museum)에 ‘진정 공간’(사진)을 시범 도입한다고 밝혔다. ⓒ런던교통공사(TfL) 홈페이지
7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런던 지하철에 시범 설치된 ‘진정 공간’을 두고 온라인에서 다양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간의 크기와 개방형 구조, 설치 위치를 두고 “개집 같다”, “개미를 위한 공간이냐”는 신랄한 반응까지 나왔다.
런던 지하철과 버스를 운영하는 런던교통공사(Transport for London·TfL)는 지난 4일 미국 업체 누크(NOOK), 자폐 연구·지원 자선단체 오티스티카(Autistica)와 손잡고 일링 브로드웨이(Ealing Broadway)역과 코벤트 가든의 런던교통박물관(London Transport Museum)에 ‘진정 공간’을 시범 도입했다.
안내방송과 열차 소음, 밝은 조명, 밀려드는 사람들까지 여러 자극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대중교통 환경은 자폐인을 비롯한 일부 신경다양성 이용객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런던교통공사가 ‘진정 공간’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혼잡한 이동 환경에서 압도감을 느낀 이용객이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감각을 조절하고 안정을 되찾은 뒤 다시 이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런던교통공사의 설명을 보면, 일링 브로드웨이역에 설치된 공간은 주변의 자극을 줄이는 구조에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과 차분한 색채를 적용했다. 고정식 좌석과 단차 없는 출입 구조를 갖췄고, 휠체어 등 이동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유아차, 보조견과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도 고려했다.
런던교통공사는 9월4일(현지시각) 일링 브로드웨이역과 코벤트 가든의 런던교통박물관에 ‘진정 공간’(사진)을 시범 도입한다고 밝혔다. ⓒ런던교통공사(TfL) 홈페이지
런던교통공사가 페이스북을 통해 진정 공간을 공개하자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작 진정하기에는 너무 작고 너무 열려 있고 너무 붐비는 곳에 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작은 부스 형태의 외관에는 “개집 같다”, “개미를 위한 공간 같다”, “작은 수납장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승강장으로 향하는 계단과 엘리베이터 가까이에 자리 잡은 위치 역시 ‘진정 공간’이라는 목적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당사자들은 개방형 구조를 문제 삼았다. 자신이 자폐인이라고 밝힌 한 이용자는 “저 공간에는 문이 필요하다”며 “그대로 노출돼 있어 지붕이 달린 벤치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쳐다보지 않도록 차라리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용자는 “구조도, 위치도 제게는 진정 공간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준 것은 고맙다”고 글을 남겼다.
런던교통공사 역시 이번 공간을 완성된 답으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일링 브로드웨이역의 진정 공간을 일정 기간 시범 운영하면서 이용객들의 경험과 의견을 수집해 향후 보다 포용적인 공간 설계에 활용할 계획이다. 코벤트 가든의 런던교통박물관에서도 별도의 진정 공간을 8주 동안 시험 운영한다.
그렇다면 한국 지하철은 어떨까. 현행법은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대중교통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지하철의 접근성 정책은 엘리베이터 설치나 승·하차 지원 등 물리적인 이동 편의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음과 빛, 인파 등 감각 자극으로 이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한 ‘저자극 휴식 공간’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국내 지하철에 비슷한 공간이 도입될 경우 장시간 점유나 목적 외 이용을 막기 위한 운영 기준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별도의 이용 제한이 없다면 한 이용자가 오랜 시간 머물거나 수면 공간으로 사용하는 등 정작 휴식이 필요한 이용자가 공간을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장애 여부를 확인하거나 이용 대상을 제한할 경우 필요한 사람이 제때 이용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