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증권가 디지털자산 경쟁에서 두드러진 전략은 '거래소 지분 확보'였다. 한국투자증권은 글로벌 가상자산 기업과 협력해 코인원에 올라탔고, 삼성증권은 새롭게 두나무 주주가 됐으며 한화투자증권은 두나무 지분을 늘렸다. 미래에셋그룹은 비금융 계열사를 통해 코빗을 아예 인수했다.
다만 NH투자증권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NH투자증권은 연결기준 자기자본 10조 원을 넘긴 대형 3사(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 거래소 지분투자와 관련이 없는 기업이다.
그렇다고 NH투자증권이 손을 놓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NH투자증권은 이미 토큰증권 경쟁에서 선두 주자의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은 2023년 3월 토큰증권 협의체 'STO 비전그룹'을 출범시켰고, 그 해 5월에는 참여사를 8개사에서 NH농협은행 포함 12개사로 확대했다.
배광수 NH투자증권 각자대표이사는 지분을 사서 인프라를 소유하기보다, 현재까지는 업계가 함께 쓰는 인프라에 올라타는 쪽에서 토큰증권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NH투자증권이 현재 공개적으로 드러낸 디지털자산 진입점은 거래소가 아니라 자본시장 인프라인 셈이다.
NH투자증권은 연결기준 자기자본 10조 원 이상 증권사 가운데 유일하게 거래소 지분투자와 관련이 없는 기업이다. ⓒNH투자증권
◆ 거래소 지분에 1조원 넘게 쏟아부은 금융권, NH투자증권은 조용했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전통 금융사들의 가상자산 전략은 거래소 지분 투자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래에셋그룹 비금융 계열사인 미래에셋컨설팅은 코빗 지분을 97.15%까지 늘렸다. 취득 주식 2849만5701주에 투입 금액은 1413억6717만 원이다. 2월 지분 92.06%(1334억원)를 사들이는 인수 계약을 맺은 뒤 7월22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취득을 마무리했다. 미래에셋그룹은 코빗의 새 법인명을 '디지털엑스'로 바꾸고 전통 금융과 디지털자산을 아우르는 생태계 구상을 공개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코인원에 800억 원을 투자해 지분 20%를 확보했다. 글로벌 가상자산 기업인 OKX벤처스도 같은 조건으로 참여해 두 회사가 합계 1600억 원에 40%를 손에 쥐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은 7월22일 대주주 변경 신고를 수리했다.
삼성증권·삼성SDS·삼성카드는 5월28일 두나무 주식 139만주를 6128억원에 취득하기로 결의했다. 그룹 합산 지분율은 4%다. 한화투자증권은 카카오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두나무 지분 3.90%(136만1050주)를 5978억 원에 추가로 사들여 지분율을 5.94%에서 9.84%로 끌어올리며 3대 주주가 됐다.
반면 NH투자증권은 이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NH투자증권은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 투자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거래소 지분투자와 관련해서 아직 정해진 사안은 없다"며 "토큰증권 관련해서는 다각도로 여러 가지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배광수가 택한 진입점은 코스콤 공동플랫폼, 준비 시한은 내년 2월
경쟁사들이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 투자에 공을 들이고 있던 7월22일, NH투자증권은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TFT)를 신설했다. 팀장은 강민훈 디지털사업부 대표가 맡았다. 상근 1명에 비상근 6명, 운영 기간은 12월 31일까지로 필요시 연장하는 한시 조직이다.
디지털사업부는 배광수 대표가 총괄하고 있는 부문이다. 배 대표는 6월3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신재욱 대표이사와 함께 각자대표로 선임되며 자산관리(WM)·디지털·채널·리서치를 맡았다. 임기는 2028년 2월 말까지다.
개정 전자증권법은 2027년 2월4일 시행된다. 토큰증권이 '분산원장등록주식등'이라는 이름으로 제도권에 들어오는 날이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배 대표는 8월12일 서울 영등포구 코스콤 본사에서 윤창현 코스콤 사장과 '토큰증권 플랫폼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NH투자증권이 인프라를 사거나 혼자 짓는 대신 여러 증권사가 나눠 쓰는 표준 인프라를 택했다는 것이다. 조 단위 현금이 오간 경쟁사들의 지분 거래와 달리, NH투자증권이 현재 공개적으로 꺼내든 카드는 한시적인 TFT와 코스콤 공동플랫폼 협력인 셈이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코스콤이 보유한 공동망 인프라를 활용해 토큰증권의 주요 발행 프로세스에 대한 실증(PoC)을 추진할 것"이라며 "제도 시행 전까지는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업무 적용 방안을 검증하고 향후 사업화 방향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코스콤은 시장 도입 초기 개별 사업자의 시스템 구축 부담과 중복투자를 줄이기 위해 다수 증권사가 함께 쓰는 공동플랫폼 'KoSTO'를 구축하고 있다. 분산원장, 증권·원화계좌 연계, 보안 등을 표준 인프라로 제공한다는 것이 이 공동플랫폼의 목표다.
그동안 코스콤과 협력해온 곳은 키움증권, 대신증권, IBK투자증권, 유안타증권, BNK투자증권, DB증권, iM증권, 메리츠증권, 교보증권, 다올투자증권, 우리투자증권 등이다. NH투자증권의 합류 이후 9월1일 현대차증권도 합류하면서 협력 증권사는 13곳으로 늘었다. 나머지 12곳은 대부분 중견·중소형사다. 협력 증권사 가운데 연결기준 자기자본 10조 원 이상인 곳은 NH투자증권이 유일하다.
배 대표는 협약 당시 "디지털자산의 제도권 편입은 향후 자본시장의 발행과 유통 구조뿐 아니라 금융서비스 전반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한다"며 "코스콤과의 협력을 통해 토큰증권 사업에 필요한 인프라와 업무 프로세스를 선제적으로 검증하고, 당사가 보유한 자본시장 역량을 디지털 기반 금융서비스로 확장할 수 있는 사업 기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점은 배 대표의 이 발언에 '거래소'도 '가상자산'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 대표의 언어는 인프라와 업무 프로세스, 그리고 NH투자증권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본시장 역량에 머물러 있다. NH투자증권이 현재 토큰증권 사업에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채권 주관 1위의 발행 역량, 토큰증권 초기 시장에서 갖는 무게
NH투자증권은 무엇을 토큰화하는 것이 기존 사업 역량과 가장 잘 맞물리는지와 관련해서도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NH투자증권은 미술품·부동산 등 비정형 자산뿐 아니라 채권 등 정형증권 영역도 함께 검토하고 있으며, 금융투자회사가 보유한 기존 발행·유통 역량과의 연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정형증권 분야가 사업성이 높은 영역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배 대표와 NH투자증권이 근거로 들고 있는 '기존 발행 역량'은 NH투자증권의 발행 관련 실적에서 실제로 확인된다.
기업분석전문 버핏연구소가 집계한 2026년 상반기 리그테이블(공모금액 기준, 공동주관 포함)에 따르면 NH투자증권의 채권자본시장(DCM) 주관 공모금액은 15조8279억 원으로 KB증권(20조6715억 원)에 이어 2위였다. 인수수수료는 99억 원으로 KB증권(97억 원)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세부 영역을 살펴보면 여신전문금융회사채(여전채) 주관 공모금액이 5조7830억 원으로 1위였다. 인수금액(1조8540억 원)과 인수수수료(15억 원), 주관건수(104건)까지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주식 발행 쪽도 마찬가지다. NH투자증권의 상반기 기업공개(IPO) 주관 공모금액은 6922억원으로 1위였고 주관건수 7건, 인수금액 3622억 원, 인수수수료 72억 원도 모두 1위에 올랐다. 1분기 케이뱅크(공모금액 4980억 원)를 삼성증권과 공동 대표 주관한 것이 실적을 끌어올렸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제도 세부 내용이 최종 확정되지 않은 만큼 시장성과 규제 환경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단계적으로 사업모델을 구체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NH투자증권이 이야기하는 '제도 세부 내용'은 9월 말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는 9월4일 토큰증권 정책방향을 발표했다. 이 발표에 따르면 1단계 토큰화 대상에는 기관투자자 전용 사모사채가 포함됐다. 금융위는 발행이 허용되는 증권의 범위와 장외거래소 거래한도 등 하위법규에 담길 세부 내용은 9월 말 입법예고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