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만에 처음 마주한 아버지의 글씨였다. 아버지를 기억할 유품 한 점 없이 살아온 독립운동가의 아들은 7월25일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을 찾아 아버지의 붓글씨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평생 그리워한 아버지의 흔적을 이제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글씨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같은 독립운동가를 핍박하던 친일파의 글씨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7월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 '우리들의 밥상'에 전시됐다가 외부 제보로 철수한 유묵 '일반시국은(一飯是國恩)'의 필자 문제와 관련해 해당 작품이 애국지사 박원근(朴源根, 1912~1950) 선생의 유묵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朴重陽, 1874~1959)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7일 밝혔다. 친일파 박중양이 일본 유학 시절 '박원근'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서예 작품이라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에 따르면, 박중양의 이명은 박원근(朴源根)으로 나타났다. 해당 인물은 일본 유학 시기까지는 박원근, 1903년 귀국 무렵부터는 박중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박물관은 이 작품을 애국지사 박원근 선생이 쓴 것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이름·호 등을 적고 도장을 찍어 작품의 주인을 표시하는 낙관(落款)에 적힌 ‘박원근’이 박중양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박물관은 지난 8월10일 작품을 즉시 철수하고, 12일 국민과 유가족에게 검증 절차가 미흡했다며 사과했다.
이후 박물관은 유물의 내력을 다각도로 교차 검증했다. 서예·근현대사·고문헌·보존과학 분야 전문가 7인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분야별 검증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종합해 이번 결론을 확정해 7일 발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애국지사 박원근 선생 유가족께 조사 경위와 결과를 설명하고 거듭 사과드릴 예정"이라며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전시품 및 전시내용에 대한 사전 검증을 강화하고 근현대사 분야 내외부 전문가풀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 관장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은 박물관이 국민 앞에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데 이에 대해 미흡했다"며 "아버지의 유품으로 알고 마음을 다해 관람해 주신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송구한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 전시품 검증 절차를 더욱 강화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